제약사 오너 2, 3세들의 경영 참여가 늘고 있다. 녹십자홀딩스는 창업주의 손자가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10년 만에 형제 경영을 예고했다. 한미약품도 장남에 이어 차남도 회사 경영에 적극 참여할 전망이다. 제일약품, 일동제약 등도 후계자들의 경영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 상태다.
8일 녹십자홀딩스는 오는 24일 열리는 정기 주주총회에서 허일섭 회장과 박용태 부회장을 사내이사로 재선임하는 안건과 허용준 부사장을 신규 선임하는 안건을 의결한다고 공시했다. 이번에 새롭게 사내이사 후보로 추천된 허용준 부사장은 고 허영섭 회장의 3남이자 녹십자 창업주인 고 허채경 회장의 손자다.
허용준 부사장은 향후 허일섭 회장과 공동으로 녹십자홀딩스의 대표를 맡을 가능성이 높다. 단독으로 녹십자홀딩스를 경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허용준 부사장이 녹십자홀딩스의 대표이사로 선임되면 허은철 녹십자 사장(45)과 그룹 경영을 이끄는 ‘형제 경영’을 시작하게 된다.
고 허영섭 회장의 차남인 허은철 사장은 지난 2014년 12월 녹십자의 대표이사로 선임되며 경영 전면에 나섰고 지난해부터 단독 대표체체를 시작했다. 허은철 사장은 제약협회 부이사장단의 회의에도 직접 참여할 정도로 회사의 간판 역할에 주력하고 있다. 고 허영섭 회장의 장남인 허성수씨는 회사 경영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
허은철 사장과 허용준 부사장이 각각 녹십자와 녹십자홀딩스의 경영에 나서면 회사 입장에서는 지난 2007년 이후 10년 만에 형제 경영이 대를 이어 시작된다는 의미가 있다.
녹십자홀딩스의 경우 지난 2004년부터 5년 동안 허영섭·허일섭 형제가 공동으로 대표이사를 맡았지만 고 허영섭 회장이 타계한 2009년 이후 허일섭 회장이 한상홍 부사장, 이병건 사장 등 전문경영인과 공동으로 회사를 경영했다.
녹십자는 지난 2004년 8월부터 2년 5개월 동안 허영섭·허일섭 형제경영이 진행됐다가 2007년 이후에는 허일섭 회장이 허재회 사장, 조순태 부회장, 이병건 사장 등 전문경영인들과 짝을 이뤄 대표이사를 맡았다.
고 허영섭 회장의 별세 이후 조순태 부회장, 이병건 사장 등 전문경영인이 후계자들 곁에서 조력자 역할을 수행했고, 경영 수업을 마친 후계자들이 본격적으로 경영 전면에 나서는 셈이다.
다만 녹십자홀딩스와 녹십자의 후계구도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현재 녹십자홀딩스의 지분구조를 보면 허일섭 회장이 11.03%로 가장 많고 고 허영섭 회장의 3남인 허성수(1.02%)·허은철(2.42%)·허용준(2.52%)씨의 지분율은 높지 않다. 허영섭 회장이 보유 중인 주식의 상당부분은 사회복지재단 등에 기부했기 때문이다. 허일섭 회장의 자녀들도 각각 1% 미만의 주식을 보유 중이다.
녹십자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향후 녹십자홀딩스의 대표이사를 누가 맡을지 결정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한미약품은 오는 10일 열리는 정기 주주총회에서 임종훈 전무(40)를 사내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을 의결한다. 임종훈 전무는 한미약품의 창업주인 임성기 회장의 차남이다. 임 전무는 그동안 회사에서 경영기획 업무를 맡았다.
한미사이언스는 지난해 3월 임종윤 사장의 첫 단독 대표이사 체제를 가동했다. 기존에는 임성기 회장과 임종윤 사장의 공동 대표체제를 운영했지만 임 회장의 임기만료로 등기이사에서 물러나면서 임 사장의 단독대표 체제가 출범했다. 임 사장은 한미약품에서도 사장을 역임 중이다.
임성기 회장의 장녀 임주현 전무(43)는 한미약품에서 인재개발과 업무를 맡고 있다. 한미사이언스의 보유 지분율은 임종윤 사장, 임주현 전무, 임종훈 전무가 각각 3.59%, 3.54%, 3.13%로 유사한 수준이다.
제일약품은 지난해 11월 일반의약품 사업을 담당하는 제일헬스사이언스를 출범하면서 오너 3세 한상철 부사장(41)에 초대 수장을 맡겼다. 한 부사장은 제일약품 창업주인 고 한원석 회장의 손자이자 한승수 회장의 장남이다.
한 부사장은 마케팅본부 상무, 경영기획실 전무 등을 역임하며 경영수업을 받았고 지난 2015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사실 제일약품 화이자 등 다국적제약사의 신약 판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아직 자체개발한 신약은 없다. 한 부사장 입장에서는 제일약품의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해야 하는 숙제가 주어진 셈이다.
이밖에 일동제약은 지난해 8월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면서 본격적인 오너 3세 경영을 시작했다. 일동제약은 투자(일동홀딩스), 의약품(일동제약), 바이오 및 건강기능식품(일동바이오사이언스), 히알루론산 및 필러사업부문(일동히알테크) 등으로 분할했는데 핵심사업 회사인 일동제약은 윤웅섭 사장(50)이 단독대표를 맡았다. 윤 사장은 일동제약 창업주의 손자이자 윤원영 회장의 장남인 3세 경영인이다.
일동제약은 지분 승계 작업도 사실상 마무리 단계다. 지난해 3분기말 기준 지주회사 일동홀딩스의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자의 지분율은 31.72%다. 윤원영 회장이 6.42%, 윤웅섭 사장이 1.67%의 지분을 각각 보유 중이고, 최대주주는 8.34%를 보유한 씨엠제이씨다.
지난 2015년 윤 회장이 지난해 씨엠제이씨의 지분 90%를 윤 사장에 증여하면서 사실상 윤 사장이 최대주주로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