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지금 숨이 가쁘다. 안팎으로 힘겹고 고단하기 짝이 없다. 대통령 리더십이 망가진 채 국민은 둘로 갈라져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이후를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회원 수 2만이 넘는 대한변호사협회(이하 대한변협)도 리더십 갈등을 겪었다. 2월 27일 정기총회에서 취임한 제49대 김현(金炫·61) 회장은 9일 만인 3월 7일 임시총회를 열어서야 집행부 구성을 마칠 수 있었다. 그는 로스쿨 출신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당선됐으나 사시 존치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집행부에 들어 있다는 이유로 집행부 선출안을 반대하는 바람에 통합 호소와 설득에 시간이 걸렸다. 변호사업계의 화합을 가장 큰 기치로 내건 그에게는 ‘화합 집행부 구성’이 중요한 선결과제였다.
헌재가 10일 오전 11시에 선고를 함에 따라 ‘탄핵심판 결정 승복 서명운동’을 벌여온 대한변협은 더 바빠졌다. 김 회장은 지난 6일 이 운동을 시작했다. 협회 소속 변호사 1000여 명이 이미 서명을 마쳤다. 변호사 80여 명이 반대 성명을 내며 반발하고 있지만, 사회 저명인사들이나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8일 오전 대한변협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승복운동을 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무조건 승복해야 합니다. 헌법에 따른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을 승복하지 않으면 국민 스스로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고, 앞으로 우리 사회에 더 이상 법치주의는 없게 되지요. 승복하는 것이 법치주의이며 선진국의 모습입니다. 탄핵심판 결정으로 그동안의 갈등을 끝내고 우리 사회가 조속히 정상화되어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야지, 이것이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는데, 탄핵이 인용(認容)될까요?
“우리 사회는 짧은 기간에 경제, 민주주의 및 법치주의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런데 최순실 사태로 이러한 성취가 무너졌습니다. 근본적으로 국민주권을 사인(私人)에게 넘긴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입니다. 게다가 권력으로 돈을 모으고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적용했으니 탄핵받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명운동이 호응을 얻으려면 변호사들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일 텐데.
“안타깝게도 요즘은 변호사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져 사회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해야 합니다. 변호사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으로 사회를 위해 봉사할 때 신뢰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법조인들 무엇이 문제입니까?
“젊은 법조인들을 볼 때 금전지상주의가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우리 사회 자체가 그렇게 된 영향도 있을 테지만 힘들게 공부하고 어렵게 변호사가 돼서 그런지 보상심리가 꽤 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는 영리만을 추구하는 비즈니스맨이 아닙니다. 변호사법상 기본적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하는 공공성을 지닌 법률전문직입니다. 변호사법은 변호사에게 공익활동을 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의무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변호사가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고질적인 전관예우, 각종 부정비리와 연루되거나 사회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거액의 수임료 수수 등으로 자주 물의를 빚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호사들의 윤리의식을 높이는 활동을 하는 한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열악한 근무조건에 내몰린 변호사들을 위해 신규 변호사 등록비 부담 경감, 젊은 변호사들의 활로 개척, 로스쿨로 일원화한 법조인 양성제도 정착 등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게 김 회장의 공약이다. 그는 특히 판사의 승진제를 폐지하고 판사, 검사가 변호사가 되지 못하게 평생법관제도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법조비리도 문제이지만, 최근엔 변호활동의 내용과 방법에 대해서도 논란이 거세졌다. 헌재 탄핵심판의 대통령 측 대리인 김평우(金平祐·72) 45대 변협회장의 법정을 무시한 막말 변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평우 변호사를 징계하기로 했다면서요?
“그런 말을 했지요. 그러나 김 변호사의 변론이 적절한 것은 아니었지만 변론권의 일환으로 볼 수 있고, 징계는 변론권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많이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사실 변호사의 변론권은 지금도 100% 보장받고 있는 게 아닙니다. 변협은 변론권을 보호하는 단체인데 이를 적극적으로 징계하는 것은 맞지 않는 점도 있습니다.”
7일 열린 상임 이사회에서도 징계 문제로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추후 더 논의키로 했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소설가 김동리(金東里·1913~1995)의 아들, 김 회장은 시인 김규동(金奎東·1925~2011)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다. 잘 알다시피 김동리는 우리 문단에서 우익 보수의 대부였고, 김규동은 민주화 통일운동에 앞장선 진보 시인이었다. 두 아들이 지금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으니 흥미를 끌 만하다.
김 회장의 좌우명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자.’ 그는 회장에 취임하면서 각종 사회단체의 이사나 고문 등 돈을 받게 되는 직함 25개를 대부분 정리하고 돈을 내는 것만 남겨두었다. 등산을 좋아하는 그는 늘 하던 대로 계단을 걸어 올라가 18층 사무실에 아침 8시 반이면 출근한다.
변협 내부로는 사시 출신과 로스쿨 출신의 반목도 공들여 해소해야 할 숙제다. 그래서 ‘법조화합 대통합위원회’를 신설하고 연수원 출신과 로스쿨 출신을 골고루 기용해 변호사업계의 대통합을 이뤄낼 계획이라고 한다. 젊은 변호사들과 여성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부회장과 상임이사의 여성 비율을 대폭 높였다.
그의 사무실 벽면에는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등 98가지를 빼곡히 적은 ‘김현 협회장 버킷리스트’가 걸려 있다. 변협 회장은 임기 2년에 연임할 수 없게 돼 있는데, 이 많은 일을 다 해낼 수 있을까. 실패하더라도 의미는 있을 것이다.
인간은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 실패해 보지 않은 삶은 위태롭다. 실패해 보지 않은 법조인은 더 위태롭다. 법조인은 자기만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며 그렇게 살면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의 실패 경험은 무엇이었나. 중학입시에 실패해 재수했고, 대학입시 때도 실패해 재수했다. 1980년 행정고시,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유기정학 처분을 받았다는 이유로 면접에서 계속 탈락했다. 그래서 미국 유학을 갔던 그는 은사인 송상현 서울대 법대 교수가 다시 한 번 사시 면접을 볼 수 있게 보증해줘 최종 합격할 수 있었다. 2013년엔 처음 직선제로 치러진 47대 대한변협 회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당신처럼 기자가 되기를 원했다. 기대와 달리 법조인이 되자 실망도 했지만 서울지방변호사회장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그의 사무실에는 아버지의 서각(書刻) 작품이 많이 걸려 있다. 특히 책상 뒤편에는 아버지의 사진과 시 액자가 걸려 있다. 김 회장은 아버지가 지켜보는 사무실에서 아버지와 함께 근무하고 있다.
본지 주필 fusedtree@ / 공동취재 박은비 기자 silverline@
김현 회장은 해상법으로 독보적인 법무법인 세창의 대표 변호사이자 국내 몇 안 되는 해상법 전문가다. 많고 다양한 이력 중 몇 가지를 간추린다.
▦경복고, 서울대 법대 졸 ▦제25회 사시 합격 ▦서울대 대학원, 미 코넬대 법학 석사, 미 워싱턴대 법학박사 ▦런던국제중재재판소(LCIA) 중재인 ▦대한변협 사무총장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협 변호사연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