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 주주총회 시즌을 맞아 제약사들의 올해 사장단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한미약품, 녹십자, LG생명과학 등은 회사 기틀을 마련한 전문경영인들이 임무를 완수하고 회사를 떠났다. 일동홀딩스, 셀트리온, 제일약품 등은 기존 대표이사 체제를 유지하며 안정을 꾀하는 모습이다.
◇이관순 한미약품 사장, "신약개발로 위기 극복" 약속 실천 후 퇴임
15일 업계에 따르면 한미약품은 최근 사장단을 교체했다. 우종수 부사장, 권세창 부사장을 신임 공동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했고 이관순 사장은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우종수 사장은 경영관리 부문을 총괄하고, 권세창 사장은 신약개발 부문을 총괄한다. 한미약품은 최근 손지웅 부사장이 LG화학으로 옮긴 바 있다.
이로써 한미약품은 지난 2015년 초대형 기술수출을 성사시켰을 당시 신약개발 주역으로 꼽혔던 이관순 사장, 손지웅 부사장, 권세창 사장 중에서 주요 경영진에는 권세창 사장만 남게 됐다. 권 사장은 2015년말 부사장으로 승진한 이후 1년여만에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관순 사장은 회사에서 상근고문 역할을 맡는다.
연구소장 출신인 이 사장은 한미약품의 신약 개발을 진두지휘하며 대형 기술수출도 직접 이끌어냈지만 자발적으로 대표이사 사장 자리를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기술수출 권리 반환 이후 늑장 공시와 임직원들의 미공개정보 이용 주식거래 등의 악재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의도에서다.
이 사장이 7년간 한미약품을 이끌면서 거둔 성과는 손에 꼽기도 힘들다. 이 사장은 서울대 화학교육과 졸업 후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1984년 한미약품에 연구원으로 입사한 이후 33년간 한 회사에 몸 담으며 ‘연구원 신화’를 썼다.
이 사장이 대표이사로 선임된 지난 2010년 당시 한미약품은 1973년 설립 이후 처음으로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심각한 위기에 빠진 상태였다. 2000년대 들어 한미약품이 주도했던 복제약(제네릭) 시장이 과열양상으로 번지면서 한미약품의 성장세가 한풀 꺾였다.
일부 의사들 사이에 “한미약품이 리베이트 쌍벌제를 주도했다”라는 근거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불매운동에 시달리기도 했다. 급기야 ‘영업 전문가’ 임선민 사장이 실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고 이관순 사장이 구원투수로 투입됐다.
이 사장은 대표이사로 선임된 이후 “변화와 혁신을 강조한 `새 한미`”를 공표했고 유망 신약 발굴을 목표로 연구개발(R&D) 전략도 전면 개편했다. 이 사장은 신약과 복합제에만 집중하고 기존에 캐시카우 역할을 했던 제네릭과 단순 개량신약 개발은 중단했다. 소모적인 경쟁을 피하고 자체 R&D 역량을 강화해 글로벌 무대를 본격 겨냥했다.
비록 최근 일부 과제의 권리반환과 계약 수정이라는 악재도 있었지만 한미약품은 2015년부터 총 7건의 대형 신약 기술수출을 성사시켰다. 이 사장이 취임 당시 내세운 "글로벌 제약사로 도약하려면 이제는 연구개발의 성과를 내야한다"라는 약속을 지켰다.
한미약품이 지난 2년간 기술수출로 받은 계약금 5365억원은 이 사장의 대표이사 부임 첫 해 매출(5125억원)보다 많은 규모다. 이 사장은 글로벌제약사들과의 협상에서도 노련한 정면승부로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내며 '협상의 귀재'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 사장은 ‘연구원 출신은 영업에 취약하다’는 일각의 편견도 깼다. 환경 변화에 맞는 적절한 영업전략을 구사했고,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신제품을 적기에 내놓으면서 회사의 실적 개선도 이뤄냈다. 의약품 조사업체 유비스트에 따르면 한미약품의 지난해 원외 처방실적은 전년대비 14.9% 성장한 4558억원을 기록하며 국내외 제약사 중 2위에 올랐다.
한미약품의 기술수출 성과에 가려졌지만 내수 시장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상당수 국내업체들이 신제품 발굴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기존에 없는 조합의 복합제, 효과적인 특허 전략 등을 앞세워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내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정일재 LG생명과학 사장, ‘잘하는 분야에 주력’ 실속 경영으로 최대 실적
LG생명과학의 마지막 대표를 역임한 정일재 사장도 예상치 못한 조직변화로 임기를 마지지 못했지만 상당한 공을 세우고 제약업계를 떠났다. LG생명과학은 지난 1월 LG화학으로 흡수되면서 소멸됐고, 정일재 사장은 LG경제연구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LG생명과학은 지난 2003년 자체개발신약 '팩티브'가 국산신약 최초로 미국 FDA의 허가를 받았지만 실적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2010년 미국 길리어드가 진행중이던 C형간염치료제는 임상시험이 중단되기도 했다.
LG생명과학의 위기설이 불거지자 제약산업 경험이 전무하지만 탁월한 경영 능력으로 반전을 이뤄내자는 취지로 정 사장이 투입됐다. 정 사장은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전념하자”는 실속경영을 내세우며 기존의 R&D 전략을 모두 뜯어고쳤다. 대사질환치료제를 비롯해 바이오의약품·백신 등의 분야에 역량을 집중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정 사장은 개발중이던 B형간염치료 신약과 회사 첫 신약 ‘팩티브’의 판권을 일동제약에 넘겨주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정 사장은 경쟁사인 녹십자를 직접 찾아가 R&D·영업 제휴를 논의할 정도로 회사 체질개선에 공을 들였다.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되 효율적인 R&D 투자로 중장기 먹거리를 발굴하겠다는 전략이다.
정일재 사장의 실속경영은 LG생명과학의 마지막 실적에서 빛을 발했다. LG생명과학은 지난해 매출액 5323억원과 영업이익 472억원을 기록했는데, 모두 창립 이후 신기록이다.
LG생명과학이 지난 2012년 국산신약 19호로 허가받은 당뇨약 ‘제미글로’가 복합제를 포함해 매출 510억원을 기록하며 국산신약 최초로 연 매출 500억원 고지를 선점했다. 제미글로는 인슐린 분비 호르몬 분해효소(DPP-4)를 저해하는 작용기전으로 갖는 약이다.
제미글로의 성장은 약물의 시장성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영업 전략의 결과로 평가된다. 지난해 LG생명과학은 경쟁사 대웅제약을 제미글로 판매 파트너로 선정했다. 대웅제약이 지난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 동안 첫 DPP-4 억제제 ‘자누비아’를 판매해온 영업 노하우를 제미글로 판매에 접목하면서 시너지를 냈다. "영업사원이 200명 남짓한 LG생명과학의 주특기는 영업이 아니다"라는 정 사장의 경영 전략이 주효한 셈이다.
히알루론산 필러 ‘이브아르’는 중국 시장에서의 고공비행을 발판 삼아 58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새로운 캐시카우로 자리매김했다. 비록 정 사장이 회사의 흡수 합병으로 자리를 옮기며 신약 개발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기존의 틀을 깨는 과감한 전략을 실천한 LG생명과학의 마지막 대표로 남게 됐다.
최근 종근당홀딩스로 이적한 이병건 전 녹십자홀딩스 사장도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전문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이병건 사장은 LG연구소 안전성 센터장, 삼양사 의약사업 본부장 등을 거쳐 2004년 녹십자에 입사했다. 이 전 사장은 녹십자에서 개발본부장, 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2014년부터 3년간 녹십자홀딩스 대표이사를 맡았다. 이 전 사장은 녹십자의 R&D를 총괄 지휘하며 백신ㆍ혈액제제 등의 사업을 육성한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 전 사장은 녹십자에서 개발본부장을 맡을 당시 국내 최초의 독감백신 개발을 주도했다. 지난 2009년 신종플루가 유행했을 때 국내에서 독감백신을 보유한 업체가 없어 불안감이 확산됐는데, 당시 녹십자가 국내 최초로 독감백신을 허가받으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녹십자의 독감백신 개발로 우리나라는 미국·유럽·호주·일본 등에 이어 세계 8번째 신종플루 백신의 자체 개발 생산국으로 기록됐다. 이 전 사장은 2013년부터 한국바이오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편 올해 주주총회에서 연임에 성공한 CEO들도 눈에 띈다
일동홀딩스는 정연진 부회장을 오는 24일 열리는 정기 주주총회에서 재선임할 예정이다. 정 부회장은 1975년 일동제약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이후 영업본부장, 마케팅부문장 등을 거쳐 2011년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지난해 회사 분할 이후 지주회사 일동홀딩스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셀트리온은 기우성ㆍ김형기 공동 대표체제를 유지할 전망이다. 셀트리온은 지난 2015년 창업주 서정진 회장이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이후 기우성 사장과 김형기 사장의 전문경영인체제를 가동했고 임기 만료 이후 재선임키로 결정했다. 지난 2005년부터 제일약품의 대표이사를 역임 중인 성석제 사장도 재선임이 결정되면서 5연임이 유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