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스타 강사인 설민석 씨가 1919년 3·1 운동을 촉발한 인물들인 '민족대표 33인'에 대해 오늘날 룸살롱으로 비교할 수 있는 '태화관'에서 낮술을 마시고 독립선언을 했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특히 이처럼 논란이 된 내용은 베스트셀러로도 오른 설민석 씨의 책 '무도 한국사 특강' 초판에도 게재돼 논란이 야기됐다.
설민석 씨는 자신의 역사 강의 도중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 있었다. 태화관이라고. 대낮에도 거기로 간 거야. 그리고 거기서 낮술을 먹었다"라며 "태화관 마담 주옥경하고 손병희하고 사귀었다. 나중에 결혼한다. 그 마담이 할인해 준다고 안주 하나 더 준다고 오라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라며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 발표 장소로 태화관을 정한 데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과연 설민석 씨의 주장대로 태화관은 오늘날 룸살롱에 비교할 수 있을까?
태화관은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고급 요릿집이었다. 당초 태화관은 명월관의 인사동 지점이라고 봐야 한다. 명월관을 세운 안순환은 광화문 명월관의 규모가 작가 이완용의 개인 집인 순화궁을 사들여 조선요리옥으로 바꾸었고, 사람들은 명월관 인사동 지점을 태화관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역사학자 전우용 씨는 태화관을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라고 표현한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전우용 씨는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민족대표 33인'이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인 태화관에서 낮술을 먹고 독립 선언을 했다는 유명 한국사 강사의 주장을 둘러싼 논란이 보이기에 한 마디 얹는다"라며 "하지만 태화관을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라고 한 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요리장기', 즉 기생이 시중드는 요릿집이 처음 생긴 건 1898년으로 추정된다. 기생이 시중드는 요릿집’이 생긴 배경은 일일이 다 소개할 수 없지만, 1902년 '고종황제 즉위 40년 망육순 칭경예식' 공연차 지방에서 올라왔던 기생들이 행사가 무산된 뒤에도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뒤로 이런 요릿집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겼다”고 설명했다.
이어 "'태학관'은 고급 요릿집으로, 당시 요릿집은 결혼식 피로연장, 회갑연장, 송년회장 등으로 널리 이용됐다"라며 "태화관을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라고 한 것도 터무니없는 주장이고, '기생 시중 받으며 낮술 먹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는 것도 상상력이 과도한 주장이다. 그냥 평범한 한국사 강사가 한 얘기라면 웃고 넘어갈 일이지만, (설민석 씨가) 워낙 젊은 층의 역사인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사람이라고 하니, 짚어둘 지점이 있겠다 싶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처럼 논란이 된 설민석 씨의 주장은 그의 저서 '무도 한국사 특강'에도 초판에 게재됐다. 초판에는 '민족대표 33인'에 대해 언급하며 '룸살롱', '마담'이라는 단어가 담겨 있고, '민족대표 33인'의 행동을 "엉뚱한 행동"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 같은 표현이 논란이 되자 설민석 씨 측은 2판에서 이 같은 내용을 삭제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