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의 말] 청산대상 정치적 ‘적폐’ 제1호

입력 2017-03-2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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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전 청와대 정책실장)

사람들이 말한다. 경기가 나빠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고. 그때마다 한마디 한다. 자동화와 전산화에다 인공지능 어쩌고 하는 판에 경기가 좋아진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겠느냐고.

경제 상황이 좋아지길 기다리는 자영업자들에게도 한마디 한다. 인구 대비 자영업자의 수가 세계에서 몇 번째로 많은 나라, 그래서 서로 죽이기를 하는 판에 뭐가 되겠느냐고. 장사가 좀 된다 싶으면 더 많은 사람이 뛰어들 것 아니냐고.

트럼프 정부가 무역장벽을 높일까 걱정하는 수출 기업인들에게도 한마디 해준다. 무역장벽 정도가 걱정이면 얼마나 좋겠냐고. 자동화로 사람 쓸 일이 줄어들면서 수요 시장이 가깝고 에너지 비용이나 땅값이 싼 미국과 같은 나라의 제조업 경쟁력이 올라가고 있고. 그래서 우리 제조업 전체가 내려앉을 판이라고.

무슨 얘기들인가? 우리가 안은 문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을 수 있다는 뜻이다. 풀기도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소득 불균형의 문제, 과학기술의 문제, 가계부채의 문제, 안보 문제 등 거의 모든 문제가 다 그렇다.

실제로 어떤 문제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산업구조 조정이 그 좋은 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이지만, 지금과 같은 자본시장 구조나 투쟁적인 노조, 취약한 사회안전망 등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 투자위험을 우려하는 자본과 일자리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 하는 노동을 신산업 쪽으로 이동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근로자의 역량을 키우는 문제 또한 그렇다. 4차 산업혁명 운운하는 상황 아래 이 역시 국가의 운명이 걸려 있는 문제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 등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것과 달리, 우리는 한두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용의 85%를 담당하고 있는 중소기업들부터 그렇다. 대ㆍ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가 심한 상황에서 이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다. 역량을 키워놓으면 대기업 등 임금을 많이 주는 쪽으로 옮겨 버리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우리의 근로자는, 또 우리 경제와 산업은 어떻게 될까?

상황이 이러함에도 정치권은 이러한 문제들을 잘 보지 못한다. 대선 후보들도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리고, 가계부채를 탕감하는 등의 듣기 좋은 소리만 하고 있다. 새삼 조선 후기,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했던 세도정치 세력들을 보고 ‘이대로 가면 망하고 말 것’이라 소리쳤던 다산 정약용 선생 같은 분들이 생각난다.

문제인식 능력이 낮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국정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껏 국정 운영의 모든 책임은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나머지 정치인들은 그 막강한 권한에도 정당 차원의 간접적인 책임 정도만 져 왔다.

책임이 약하니 문제에 대한 인식이 약할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뒤로한 채 패권정치, 즉 패거리를 모아 폐쇄적으로 권한과 힘을 행사하는 정치에 골몰하게 된다. 문제를 풀려면 다양한 세력의 협력과 이해가 필요하지만, 이에 대한 절실함이 없으니 그러한 협력이나 이해가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이기고 지는 것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달리 길이 없다. 지금이라도 책임을 나눠야 한다. 이를테면 국회 선출의 책임총리제로 국회를 행정부로 끌어들이거나 여러 정당이 책임을 나누는 연정(聯政) 등을 생각해 봐야 한다. 권한과 권력이 아닌 책임을 나누기 위해서이다. 또 이를 통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일부에서는 ‘적폐청산’ 운운하며 이러한 구도를 반대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을 적폐라 하는지 몰라도, 특정 정치집단 단독으로 청산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라면 적폐라 할 만한 수준도 아닐 것이다. 홀로 풀 수 없는 문제가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을 보지 못하니 그런 말을 한다는 말이다.

책임을 나누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는 길이 없다. 그런 점에서 자신들만이 ‘선(善)’이고, 그래서 홀로 ‘악(惡)’을 물리치겠다는 태도야말로 청산돼야 할 정치적 적폐 제1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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