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역대급’ 대회는 없소!

입력 2017-03-23 10:45 수정 2017-03-2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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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이 고마운 날이었다. 지난주 일요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잠실종합경기장까지 뛰었다. 서울국제마라톤대회 10㎞ 코스. 목표는 하나, 도착지까지 한 걸음도 걷지 않고 달리기였다. 중간중간 걷고 싶은 생각을 억누르며 끝까지 뛰었으니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지인들은 완주 그 자체(‘아줌마가 그 짧은 다리로 어떻게!’)만으로도 ‘인간 승리’라며 치켜세웠다.

마라톤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시민 응원단의 힘을 받는다. 특히 이번 대회엔 열렬한 응원단 덕에 완주한 사람이 더욱 늘었을 것이다. 6㎞ 지점을 지나자 건강미 넘치는 여성들이 북을 치며 “오빠, 달려! 파이팅!”을 외쳤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던 몇몇 남성 참가자들은 기운찬 모습으로 힘차게 내 앞으로 치고 나갔다.

응원의 놀라운 힘을 눈으로 보며 ‘흥! 왜 언니 달리라는 응원은 안 해 주는 거야’라는 생각을 할 때 또 다른 응원 소리가 들렸다. “할레루야~ 아멘! 아멘!” 일요 예배를 마치고 나온 어르신들의 응원이었다.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시민들도 많았다. 황홀한 기분으로 완주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3만5000명이 달린 이번 대회에서 스물다섯 살 케냐 청년 에이머스 키프루토가 월계관을 썼다. 42.195㎞를 2시간 05분 54초에 끊었으니 그야말로 ‘철각(鐵脚)의 사나이’이다. 우승 상금과 타임 보너스로 받은 1억4700만여 원은 아내와 쌍둥이 아이를 위해 집과 땅을 사는 데 쓴다고 하니 정신도 건강한 마라토너가 분명하다.

스포츠 경기 등 어떤 행사나 모임에서 ‘뒤풀이’는 감초 역할을 하는 법. 대회가 끝난 후 동호회원들과 들어간 식당은 20·30대 마라토너들로 붐볐다. 만족한 경기였는지 여기저기에서 “역대급 대회”라는 소리가 들렸다. 추측건대 ‘역대급’을 ‘역대의 그 어떤 것보다 최고’라는 뜻으로 알고 말하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부터인가 ‘역대급’이라는 말이 ‘최고’ 혹은 ‘최악’이라는 뜻으로 방송 자막은 물론, 신문 지면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역대급 미모’ ‘역대급 무대’ ‘역대급 흥행’ ‘역대급 실업률’ ‘역대급 한파’….

그런데 ‘역대급’은 정체불명의 단어로 존재하지 않는다. ‘역대’는 ‘대대로 이어 내려온 여러 대. 또는 그동안’이라는 뜻의 명사로, ‘역대 총장’ ‘역대 전적’ ‘역대 헌법’과 같이 활용된다. 그리고 ‘-급’은 재벌급, 국보급, 전문가급 등과 같이 명사 뒤에 붙어 ‘그에 준하는’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다. 또 과장급, 국장급, 간부급처럼 직급을 나타내는 명사 뒤에 붙어 ‘그 직급’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급’을 직급이 아닌 ‘역대’에는 붙일 수 없다.

한마디로 ‘역대급’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말로, 우리말 조어법에도 어긋난다. 그러니 ‘역대 최고의 미모’, ‘역대 최고의 무대’, ‘역대 최고의 흥행’, ‘역대 최악의 실업률’, ‘최대 최악의 한파’로 표현해야 올바르다.

대회 도착점을 향해 잠실종합경기장 육상 트랙을 돌면서 느꼈던 가슴 뭉클함이 아직도 남아 있다. 비록 10㎞ 도전이었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뿌듯함 때문이다. 코스의 길고 짧음을 떠나 어떤 반칙이나 편법이 통할 수 없다는 점이 마라톤의 가장 큰 매력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니, 독자 여러분도 올봄 달리는 즐거움을 느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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