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최고경영자)의 임기를 ‘파리목숨’에 비유하기도 하는 증권가에서 10번째 연임이라는 초유의 기록을 세운 뒤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이 밝힌 소감이다.
한국투자증권은 23일 주주총회에서 유 사장의 재선임 안건을 통과시켰다고 밝혔다. 이로써 유상호 사장은 2007년 사장으로 취임한 이래 현역 금융 CEO 중 ‘최장수’ 타이틀을 이어가게 됐다.
유 사장은 2007년 47세라는 나이로 한국투자증권 사장에 취임, 증권업계 최연소 CEO로서 주목받았다. 이보다 앞선 1990년대에 대우증권 런던법인 근무시절에는 ‘전설의 제임스(Legendary James)’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제임스 본드’의 이름에서 딴 제임스를 영어 이름으로 사용했는데, 그가 국내 주식 거래량의 5%를 혼자 매매했기 때문이다.
이날 주주총회에 앞서 증권업계에서는 유 사장이 무난히 연임에 성공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실적으로 경영능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해 브로커리지, 자산관리, IB 등 전 분야에서 고른 실적을 거두며 당기순이익 2437억 원을 기록, 국내 대형 증권사 중 1위를 차지했다. 증권업계 최전성기로 꼽히는 2006년보다도 17% 많다. 단순히 이익규모 외에도 자산관리와 브로커리지, 투자은행 등 다양한 방면에서 수익기반을 갖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부분이다.
또한 초대형 IB(투자은행) 경쟁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변화’보다 ‘안정’이 필요하다는 점도 유 사장에 대한 재신임의 배경이 됐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 해 자기자본 4조 원을 넘기며 초대형IB 대열에 합류했다. 현재 국내 증권사 가운데 자기자본 규모 4조 원이 넘는 증권사는 미래에셋대우와 NH투자증권, KB증권, 삼성증권, 한국투자증권 등 5곳이다.
유 사장도 올해 초대형 IB 경쟁에 고삐를 조이겠다고 밝혔다. 그는 “초대형 IB大戰이 시작 되는 2017년 올 해를 CEO 11년차가 아닌 새로운 출발의 1년이라고 생각하겠다”며 “새로운 10년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으로 장기적인 전략하에 전 임직원들의 의지와 역량을 결집해 아시아 최고의 투자은행을 향해 매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유 사장 외에도 최근 몇 년간 국내 증권가에서는 ‘장수 CEO’들이 늘어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에는 김해준 교보증권 사장과 권용원 키움증권 사장이 임기를 확정했고, 2010년 취임한 최희민 메리츠종금증권 사장도 같은 날 주총에서 2019년까지 임기를 보장받았다. 오는 24일에는 고원종 동부증권 사장이 2020년 3월까지 임기를 보장받아 10년 임기를 확정 지을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장수 CEO가 늘어난 것과 관련해 국내 증권업계의 토양이 바람직한 변화를 맞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김규림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그동안 국내 시장은 단기적인 실적에 지나치게 집착해 CEO의 수명이 짧았다”면서 “책임을 지고 소신껏 발언하는 경영자가 늘어나면 회사 구성원들도 여러 먹거리에 도전적인 투자를 감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