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노블레스 오블리쥬

입력 2007-11-2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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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삼백여년전..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해 있던 삼국시대에 국력이 제일 약한 나라는 신라였다. 고구려는 고조선과 부여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우리나라 제일의 강국이었다. 백제는 한반도 서남쪽에 위치했지만, 그 국력과 군사력은 고구려와 대적할 만 했다. 신채호 선생은 그가 지은 조선상고사에 백제군의 용맹성은 어느 군대도 이길 수 없을 만큼 강맹했다고 전하고 있다. 반도 동남쪽 한 귀퉁이에 움츠려 있던 신라는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약했다.

그 후 백년이 지나지 않은 사이에 고구려와 백제는 멸망하고 가장 힘이 약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 혹자들은 신라가 당나라 힘을 빌어 같은 동족을 멸망시켰다고 말한다. 당나라 힘을 빌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신라가 삼국 통일한 핵심 동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국력이 가장 약했던 신라가 무슨 연유로 자기보다 훨씬 강한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가.

신라가 삼국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도층이 한데 뭉쳐 솔선수범을 보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 같이 버려 국력을 하나로 모을 수 있도록 한데 있다. 지도층이 도덕적 모범을 보이고 나라의 어려운 일에 그들이 먼저 나서는 희생정신을 보임으로써 백성들까지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국민적 대단결을 이룰 수 있었다. 신라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가 대업을 이룬 결정적인 동인이었다.

같은 시기에 고구려는 지도층 분열과 이간질로 나라가 어지러워져 국력이 분산됐다. 백제는 의자왕이 집권 후기 들어 방탕과 국정 소홀을 일삼아 나라를 병들게 했다. 국력이 강한 나라라도 분열되거나 문란해지면 힘이 약해지는 걸 삼국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국력이 약하더라도 모두가 힘을 합해 총화를 이룬다면 산술적 힘보다 훨씬 강한 힘을 나타낼 수 있음을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쥬란 지도층 인사들이 그들의 높은 사회적 신분에 맞게 처신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와 사회 헌신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적 의무에는 그들이 가진 부와 명예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포함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회 이념이자 가치다.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와 사회 헌신은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고 보다 밝은 사회로 이끌어갈 수 있는 열쇠고리 같은 역할을 한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선진사회에서는 사회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쥬가 보편화돼 있다. 대부분의 지도계층은 그들이 사회에 어떤 방법으로든 공헌해야 함을 인식하고 있다. 나라가 위태로우면 제일 먼저 전장에 나간다. 사회가 어지러우면 바른 사회로 가기 위한 국민운동에 앞장 선다. 거부들은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 사회가 선진화돼 있을 수록 그 사회의 지도계층은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당연히 수행해야 할 하나의 덕목으로 삼고 있다.

우리 사회를 살펴보자.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쥬에 속하는 계층은 주로 정치, 경제, 사회분야의 지도자들이다. 근데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나라에 노블레스 오블리쥬가 과연 존재나 하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정치 쪽을 보면, 아무래도 전•현직 대통령 등 지도자급과 원로 인사들이 그 대상이다. 그러나 생존해 있는 전•현직 대통령 치고 노블리스 오블리쥬에 충실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80년대 이후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재임 중 천문학적인 축재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것이 합법적인지 불법축재인지는 모르나 수천억원의 거금들을 손에 쥐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사회를 위해 자신의 부를 사회에 헌납하거나 국민 모두가 우러러볼 만한 명예스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은 아직도 권력과 이권에 대한 노욕(老慾)을 버리지 못한 듯 여당 편에 서서 볼썽사나운 상왕 노릇 하고 있다. 현직은 그간 점잖치 못한 언행과 돌출발언으로 이미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다른 전직 대통령들도 마찬가지다. 아들이 오직(汚職)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기도 하고, 본인이 재임 중 저질은 각종 부정부패 사건으로 구속되거나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특히 군인출신 전직 대통령들은 재임 중 치부한 재산을 지키려고 안간 힘을 쓰는 등 그야말로 속물(俗物) 행태에 집착하고 있다.

기업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삼성 그룹은 경영권 승계를 둘러싸고 대규모 탈세의혹을 받고 있다. 몇 조원의 지분을 후계자에게 양도하면서 양도소득세라고 내놓은 액수가 몇 십억원에 불과하다. 그들은 적법한 절차를 거쳤다고 하지만, 필자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삼성은 또 요즘 무슨 비자금인지 하는 것 땜에 국회에서 특별법까지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삼성만 그런 게 아니다. 얼마 전에는 현대자동차 총수가 비자금 불법 조성 문제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

이처럼 나라 지도자라 할 전•현직 대통령, 재계 총수 등 우리나라 지도자 계층은 권력을 쟁취하고 돈버는 데만 골몰했지, 그들이 사회를 위해 뭘 해야할 지를 고민하는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병역 기피도 한몫한다. 자식을 모조리 군대 안 가게 만들고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아들들이 군대에 가지 못할 만큼 병신이라는 소리를 필자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처럼 사회 각계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와 탈법 행위는 이미 도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섰다. 한마디로 나라의 불행이다. 어째서 우리나라 지도층은 적법이든 탈법이든 가리지 않고 오로지 돈 버는 벌레가 되고, 자기 권익만 채우려 할까. 당파 간 권력 쟁취가 극에 달했던 조선조 후기에 소위 명망가문이나 그 후예라는 칭송을 받은 지도자는 권력 쟁취에 몰두한 권신(權臣)들이 아니라 백성을 위하고 나라 안위를 위해 노심초사한 선비형 관리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전•정약용 형제다.

지금 대통령 선거에 나온 대통령 후보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쥬 행위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대선 후보들 가운데 진정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재산의 대부분을 아무 보상 없이 사회에 기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외국에서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부호들이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헌납하거나 기부해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당연한 의무인 듯 행하고 있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게이츠나 세계 최고 갑부 중의 한사람인 워렌 버핏도 자기 재산의 대부분인 수백억 달러를 사회에 기부하고 있다.

정치인이나 기업 총수들이 불우이웃 돕기 이벤트에 가서 금일봉 봉투 하나를 희사하거나 일일 도우미하는 깜짝쇼가 노블리스 오블리쥬가 아니다. 그런 일회성 이벤트는 글자 그대로 이벤트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게 아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쥬가 되려면 마음 속 깊이, 그리고 자신을 사회에 희생하려는 의지를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가져야만 가능하다. 지도층은 사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을 그들의 숙명으로 여겨야 한다. 지도층의 희생과 솔선수범은 그 사회를 보다 나은 사회로 만드는 밑거름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검증되고 경제적 측면에서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거나 환원하는데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라야 하겠다. 그래야 시민들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최근 BBK 사건으로 국민적 관심을 모으고 있는 대통령 후보도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행동에 옮기면 어떨까.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려면 자본가들이 청빈(淸貧) 자본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렵게 번 돈을 그냥 사회에 기부하는 게 아깝긴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버 말처럼 그가 청빈자본가로 다시 태어나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필자는 문득 해본다.

이타임즈 최재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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