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풍경] 잃어버린 봄 풍경

입력 2017-03-3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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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봄볕이 참 좋다. 창 안으로 들어온 저 봄볕 아래 가만히 손을 펴서 손바닥에 햇살을 담아 보면 지금 살고 있는 도시의 봄이 아니라 옛 시절 고향의 봄이 생각난다. 대관령 아래 산촌을 떠나 도시에 와 생활한 지 30년이 넘은 것 같다. 도시에서 대학을 다녔으니 그때부터 친다면 40년쯤 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달력으로만 시간이 가는 줄 알지 자연으로 가는 시간을 종종 잊을 때가 있다.

어린 시절에는 봄이 오면 바로 텃밭에 나가 냉이를 캐고, 달래를 캐고, 또 이런저런 꽃나무에 물이 오르고,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늘 지켜보며 자랐다. 그때는 달력이 아니라 우리 집 안팎의 꽃나무와 봄나물들로 계절이 가고 오는 것을 보고 느꼈다.

고향 시골집에 가면 아주 오래된 닥나무 숲이 있었다. 처음부터 그곳에 닥나무가 많아서 숲이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예전에 할아버지께서 젊은 날 닥나무를 한 그루 두 그루 그곳으로 파 옮겨서 숲을 만들었다. 매년 늦은 가을이면 인근의 한지 공장에서 종이꾼이 노새가 끄는 수레를 몰고 와서 닥나무를 베어 갔다. 그리고 어느 날 다시 종이꾼이 창호지 뭉치를 들고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내 어린 시절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는 집에서 쓰는 창호지를 닥나무를 키워 종이 원료를 공급하는 것으로 자급자족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시절엔가 한지를 만드는 종이 공장이 없어지고 닥나무 숲이 두릅나무 숲으로 변했다. 이번엔 아버지가 쓸모없어진 닥나무를 밑동부터 잘라내고, 예전에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 자리에 한 그루 두 그루 두릅나무를 파 옮겨 심은 것이다. 그것이 뿌리를 뻗고 새 가지를 쳐 몇 년 사이 온 밭이 두릅나무 숲이 되었다. 종이보다 나물이 더 귀한 시절이 된 것이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또 있다. 시골집 텃밭의 달래 역시 그렇다. 예전에 곡식이 귀하던 시절엔 달래가 감히 밭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고작 들어올 수 있는 경계가 밭둑까지였다. 냉이 역시 밭에서 나는 것이긴 하지만 일부러 키우지 않았다. 그냥 잡초처럼 저절로 나는 것을 캐어 바구니에 담았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러 그것을 밭에서 비닐하우스를 지어 키운다. 깊은 산에서 나는 참나물과 취나물 역시 몇 해 동안 어머니가 산에서 그것을 뿌리째 캐 밭에 옮겨 심었다. 다른 곡식보다 그것이 더 귀한 시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시골에 일 삼아, 벌이 삼아 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다니는 직업적 나물 채취꾼은 많아도 책 속에 나오는 것처럼 양지 바른 밭가에 앉아 예쁘게 나물 캐는 봄처녀는 없다. 아니, 나물 캐는 봄처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녀 총각이 없다.

전에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집 가까이 일부러 두릅밭을 만들고, 또 산에서 뿌리째 나물을 캐 와 텃밭에 심는 게 그것이 꼭 곡식보다 귀해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가까이에 두고 일부러 키우지 않으면 정작 기운 없는 시골 노인들이야말로 산에 나물을 두고도 나물 구경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높고 깊은 산엔 험해서 갈 수가 없고, 그보다 낮은 동네 산엔 그런 나물이 많지도 않거니와, 있다고 해도 힘 좋고 발 빠른 외지 전문 나물꾼이 먼저 그것을 뜯어 가 동네 노인들 차지가 없다고 했다.

베란다에 나가 손바닥에 담아 본 봄볕 속에 참 많은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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