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경제가 우리 경제 성장의 견인차에서 걸림돌로 바뀌었다는 게 문 후보의 진단으로, 정부가 나서서 ‘재벌적폐’를 청산하고 재벌의 역할을 바꾸겠다고 벼르고 있다. 재벌해체론까지 나아가진 않았으되, 재벌 개혁의 필요성 인식과 의지는 ‘경제민주화’ 바람이 거셌던 5년 전 대선 때보다도 외려 더 강해졌다는 평가다.
18대 대선과 다른 건 문 후보가 4대 재벌을 우선개혁 대상으로 정조준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그는 “역대 정부마다 재벌 개혁을 공약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건 정부의 의지가 약한 탓도 있었고, 규제를 피해 가는 재벌의 능력을 따라가지 못한 측면도 있다. 실현 가능한 약속만 하겠다”며 삼성·현대차·LG·SK 등 4대 재벌 개혁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30대 재벌의 자산 대비 비중을 봤을 때 삼성은 20%, 범삼성은 25%에 달하고, 4대 재벌의 비중은 50%, 범4대 재벌로 넓히면 66%에 달하는 만큼 4대 재벌만 잡아도 재벌 개혁의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개혁의 방향은 재벌 총수일가의 전횡을 견제할 법제도 정비, 문어발식 확장 및 경제력 집중 방지 규제 도입 등이다.
문 후보는 집중투표제, 전자투표, 서면투표를 의무화하고 재벌총수의 사익 편취 때엔 소액주주도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대표소송 단독주주권을 도입하겠다는 입장이다. 또 공공 부문부터 4대 재벌, 10대 재벌 순으로 노동자추천이사제를 도입하고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겠다는 복안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엔 전속고발권을 폐지하는 한편 재벌의 일감몰아주기, 부당내부거래, 납품단가후려치기 같은 ‘갑질’ 횡포를 보다 강도 높게 조사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권한을 줄 것으로 보인다. 공정위와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중소기업청 등 범정부 차원의 ‘을지로위원회’도 별도로 꾸릴 계획이다.
이와 함께 문 후보는 금융이 재벌의 사금고가 되지 않도록 금산분리는 강화하고, 가습기 살균제처럼 기업으로부터 소비자가 피해를 입은 경우 강력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해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다만 문 후보의 이러한 구상들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상법, 공정거래법 등 개정이 국회에서 쉽사리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당장 집중투표제 등의 내용이 담긴 상법 개정안은 민주당에서 당론으로 채택하고, 다른 정당 의원도 참여해 122명이 공동발의했음에도 재계 반발 등에 밀려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문 후보가 집권에 성공한다 해도 여소야대 국면엔 변함이 없어 개정안 처리를 장담하긴 어렵다.
법 개정이 필요하지 않은 공약은 실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문 후보는 재벌의 중대한 경제범죄에 ‘무관용의 원칙’을 적용한다는 입장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수백억 원의 뇌물을 건넨 혐의로 구속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실형을 살게 된다 해도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해 풀어주지 않을 거란 얘기다.
문 후보는 기본적으로 재벌을 개혁의 대상으로 보고 있으나,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는 태도 역시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문 후보는 지난해 10월 삼성경제연구소, LG경제연구원, SK경영경제연구소, 현대경제연구원 등 4대 기업 경제연구소장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미르·K스포츠재단 자금 모금 사태로 당내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해체 주장이 비등하던 때에 이뤄진 간담회였기에 당내에서도 뒷말이 나왔지만, 당시 그는 “우리 경제에 큰 역할을 하는 대기업과 함께 끊임없이 의견을 나누고 (경제 위기) 해결책을 모색하는 건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6일엔 문 후보를 대신해 비상경제대책단 이용섭 단장 등이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 전경련을 제외한 경제 4단체와 간담회를 갖고 경제 현안을 논의한다. 기업의 애로와 건의사항을 듣고 필요하다면 정책 공약에 반영한다는 취지다.
한편 경선 캠프 내 ‘새로운대한민국 위원회’로 영입했던 김광두 전 국가미래연구원장, 김상조 전 경제개혁연대 소장 등이 문 후보의 경제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향후 관심사다. 각각 보수,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경제학자인 이들은 경제교사 겸 정책브레인으로서 문 후보가 균형 잡힌 시각을 갖도록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