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국내 제약산업에서 ‘오픈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Open innovation)이라는 단어는 빠른 속도로 깊숙이 침투했다. 한미약품은 자체개발한 신약 후보물질을 상업화 단계까지 직접 수행하지 않고 글로벌제약사들에 기술 이전하며 연이어 ‘빅딜’을 성사시켰다. 유한양행은 지난해에만 6개 바이오벤처에 377억원을 투자했다. 외부 연구개발(R&D) 역량을 활용해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겠다는 포석이다.
크리스탈지노믹스와 와이바이오로직스의 신약 공동개발 사례와 같이 바이오텍들간의 협업도 늘고 있다. 영업·마케팅 활동에서도 제약사간 ‘협업’은 필수다. 국내에 판매 중인 DPP-4 억제계열 당뇨치료제 9개 제품 중 7개 제품은 2개 이상의 제약사가 공동으로 판매 중이다.
지난 1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진행된 ‘한국 제약산업 공동 컨퍼런스 2017’에서 다국적제약사 임원들은 ‘M&A와 BD&L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는 주제로 열린 패널 프리젠테이션에서 효과적인 협업에 대한 조언을 쏟아냈다. 이날 행사는 한국제약바이오협회와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장 마리 아르노 사노피 수석 부사장(국제거래 및 재원관리 대표)은 “한국제약사들은 부족한 역량을 보완하기 위해 다국적기업들과 파트너십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다국적기업의 장점과 한국기업의 장점이 결합하면 신약개발 분야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시각이다.
아르노 부사장은 “다국적기업들은 바이오텍이나 대학에서 발굴한 신약 후보물질을 상업화 단계까지 끌고 갈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규제 이해도가 높아 세계 시장에서 인허가를 잘 받을 수 있다”라고 소개했다. 이어 “한국기업은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훌륭한 인재들이 많고 대형병원도 근접해있다. 우수한 제조시설을 보유한 것도 한국기업들의 장점이다”라고 했다.
한국기업이 기초과학을 한 단계 진화시킨 이후 다국적제약사와 손 잡으면 글로벌 시장에서 상업화 확률과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견해다. 아르노 부사장은 “한국기업 입장에서도 다국적기업의 거대한 인프라를 활용하면 기존에 다국적기업들이 경험했던 실수와 시행착오를 피해서 더욱 민첩하게 기업활동을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사노피는 국내에서 서울아산병원, 바이오텍 ANRT와 간암 치료제 공동개발에 착수했고, 한미약품과 고지혈증·고혈압 복합제 ‘로벨리토’를 공동으로 개발한 경험이 있다. SK케미칼과는 폐렴구균 백신 공동개발 계약을 맺는 등 한국기업과의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아르노 부사장은 “전세계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유연성과 속도가 중요해지는 추세다. 과거에는 하나의 기업이 모든 걸 직접하고 시설도 크게 지었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는 끝났다. 각 기업들이 잘하는 장점을 활용해야 한다. 한국은 인상적인 헬스케어산업 생태계가 조성돼 있어 다국적기업과의 협업에서도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다”라고 조언했다.
거르키 싱 일라이릴리 부사장도 기업들간의 협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과제’라고 강조했다. 싱 부사장은 “최근 들어 임상연구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임상시험 규모가 커지고 많은 투자가 필요해졌다”면서 “어떤 회사도 대규모 투자를 독자적으로 계속 진행하는 것은 어려워졌다”라고 기업간 협업 필요성을 피력했다.
미국에서 임상1상에 진입하는 신약 후보물질 중 12%만 FDA의 최종 승인을 받고 개발 기간도 10년 이상 소요되는데 이 과정을 기업이 단독으로 진행하기에는 불확실성이 크다는 게 싱 부사장의 견해다. 릴리는 매년 매출의 20%가 넘는 50억달러(약 5조7000억원)를 연구개발비로 투자하고 있지만 기존 제품의 특허만료로 인해 매출은 감소세를 기록 중이다.
싱 부사장은 “R&D투자를 지속하면서 혁신을 도모해야만 결실을 수확할 수 있다”라고 했다. 릴리는 한미약품, 중국 기업 이노벤트바이오로직스 등과 항암제 기술을 넘겨받으며 아시아권 기업들이 발굴한 신약후보물질에도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싱 부사장은 최상의 ‘딜(거래)’을 체결하기 위해 회사 전체가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싱 부사장은 “모든 거래는 동일한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약물의 특징에 따라 고유의 특징을 나타낸다. 특정부서가 지속적으로 잠재적인 기회를 찾아야만 최고의 파트너를 만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기업과의 계약을 맺은 이후에도 리스크 관리에 주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경쟁업체의 신약 개발 속도도 예상치 못한 리스크가 될 수 있다. 지난해 한미약품이 베링거인겔하임으로부터 항암제 ‘올무티닙’의 권리를 반환받을 당시 경쟁약물보다 개발 속도가 지연된 것이 주요 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싱 부사장은 “거래 체결 이후 잠재적 리스크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과연 파트너와 호흡이 잘 맞는지, 파트너와 목표가 동일한지, 문화적인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지 등을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이어 “한국 제약산업은 제네릭에서 바이오시밀러를 거쳐 혁신 신약 개발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점차적으로 리스크가 높아지는 환경이다. 기존에 확보한 연구역량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즐리 칸 노바티스 아시아 클러스타 사업 제휴 및 라이선싱 총괄은 “거래 상대방과 현지 시장 상황에 따라 협업 형태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코마케팅, 코브랜딩, 코프로모션, 독점판매, 독점개발 등 다양한 종류의 협업 형태 중에서 최적의 선택을 해야한다는 의미다.
칸 총괄은 2개 기업이 공동으로 판매하는 코마케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칸 총괄은 “노바티스에서 코마케팅은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딜이다. 최근 유럽에서 진행한 거래 중 90건이 코마케팅이다. 아시아 지역에서 진행한 35개의 거래 중 10건이 코마케팅이 차지했다”라고 설명했다.
칸 총괄은 인도에서의 당뇨약 코마케팅 사례를 예로 들었다. 지난 2008년 노바티스가 DPP-4 억제계열 당뇨약 ‘가브스’를 발매했을 때 경쟁사인 MSD가 6개월 가량 먼저 동일 계열 약물 ‘자누비아’를 발매해 시장 선점에 어려움을 겪었다.
노바티스는 인도 제약사 USV와 손 잡고 가브스 영업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또 다른 인도제약사 엠큐어와도 코마케팅 계약을 맺었다. 2개의 인도제약사가 대도시부터 농촌 지역까지 영업을 펼치면서 가브스는 인도 시장점유율 2위에 오르게 됐다. 노바티스는 국내에서도 가브스를 판매하면서 한독, 한미약품 등과 공동판매를 진행했다.
칸 총괄은 “파트너를 선정할 때 회사가 보유하지 않은 역량을 갖춘 업체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노바티스가 추가로 엠큐어라는 코마케팅 파트너를 선정한 배경은 이 회사가 농촌지역에서 탁월한 영업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파트너사의 영업력, 자금동원능력, 판매 중인 제품 등도 고려해야 한다. 과거 다른 업체와 협업을 진행하면서 어떤 성과를 냈는지도 파트너 선정시 고민해야 할 항목이다. 각국에서의 규제 변화도 지속적으로 살펴야 한다.
칸 총괄은 “한국기업이 코마케팅을 적극 도입한다면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면서 “다만 협상을 명확하고 투명하게 진행해야만 상호 ‘윈-윈’ 할 수 있다. 협업을 시작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좋은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