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민의 ‘다이내믹’함은 어느 민족보다 우월합니다. 그런데 이런 역동성이 더 나은 결과물로 이어지는, 그러니까 한 단계 ‘승화’ 하는 힘이 부족해요.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자강(自强) 의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봄기운이 완연한 4월 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구속,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공방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사회 양극화와 보수의 붕괴, 저성장 등으로 방향타를 잃은 대한민국호(號)를 바로 잡고자 길정우 이투데이 총괄대표와 함께 김진현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이사장을 만났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개인 서재에서 본 김 이사장의 단호하고 명쾌한 어조에서 ‘팔순(八旬)’이라는 나이를 잊게 했다.
대표 원로 지성인으로 불리는 그는 이 시대의 사회문제를 하나하나 반추했다. 그리고 해법의 첫단추를 지난 현대사에서 찾았다.
◇반세기 대한민국 현대사의 산증인 = 김 이사장은 언론계 생활을 시작으로 학계와 경제계를 두루 거쳐 과학기술처(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까지 지낸 원로다. 지난달에는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이사장에 취임했다.
김 이사장은 인터뷰 내내 냉정함을 유지했다. 핵심을 찌르는 그의 화법에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반성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는 ‘대통령 탄핵과 구속’이라는 헌정 사상 초유 사태는 ‘작은 분노’에서 출발했다고 진단했다.
“우리는 촛불집회와 함께 태극기 집회라는 새로운 다이너미즘(dynamism·역동성)을 확인했습니다. 둘 모두 쉽게 식지는 않을 겁니다. 문제는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가지 집회가 앞으로 더 높은 차원의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것 같다는 데 있습니다.”
김 이사장은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 모두 분노에 가득 찼으나 양측 모두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원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그가 이같이 지적한 이유는 5·18 민주화운동, 6·10 민주 항쟁 등 지난 현대사에 유사한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지구촌 보편의 자유체제와 새로운 정치질서 창조로 승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를 보세요. 우리는 국민소득 2000달러만 넘어서면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온다고 생각했어요. 먹고살게 많아지고 세상이 풍족해지면 시위도 없어지고 온 나라가 평온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세요. 3만 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우리 민주주의는 여전히 더디게 진행하고 있잖습니까.”
소득 수준이 높아졌고 삶이 넉넉해졌지만, 여전히 사회적 불만과 병폐가 반복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그 배경으로 “우리가 국가의 기본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세계 곳곳에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급성장한 국가의 뒤에는 근간을 가볍게 여긴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같은 문제가 되풀이되곤 했다. 그는 이 고리를 끊어내려면 경제인은 물론 정부 관료 모두 “먼저 참회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2008년 리먼 쇼크 이후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영국 경제학자들이 여왕에게 참회의 글을 올렸어요. 금융위기를 미리 예측하지 못한 자신들에게 비난과 지적이 쏟아졌고, 이들이 결국 자기 자신을 자책한 겁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똑같은, 오히려 더 심한 시련을 겪었던 우리나라를 보세요. 누구 하나 사과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정치권과 사회지도층, 국민도 성찰 필요해 = 김 이사장은 사회의 혼란을 일으킨 정치권과 사회 지도층은 물론 우리 국민도 참회가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치는 갈등을 만들어내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이걸 조정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는 이런 조정 기능을 못하고 갈등만 부추겨요. 지금까지의 대통령들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한 번 따져봅시다. 그 대통령, 누가 뽑았나요?”
감추고 싶었던 우리들의 부끄러운 부분을 그는 주저 없이 지적했다.
빠르게 변하는 외교 상황도 거론했다. 한반도 주변의 미국과 중국, 일본이 강한 지도자를 앞세워 극단적인 ‘자국 이익’을 챙기는 시대다. 우리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를 두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처연한 외교를 펼치고 있다. 그뿐 아니다. 위안부 문제와 독도 영유권을 두고 일본의 국수주의 행태가 도를 넘고 있지만 의연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김 전 장관은 이 시점에서 ‘자강(自强)’이 간절히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1945년 이후에 의존했던 친미(親美)동맹이나, 1992년 국교수교 이후에 의존했던 연중(聯中)체제 모두 힘을 잃었습니다. 자 보세요. 자국 이익만 따지는 중국이 하루아침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미국도 보세요. 차근차근 보이콧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변국 의존도를 낮추고 우리 스스로 강해져야 하는 시대가 온 겁니다.”
조심스럽게 핵무장에 대한 의견도 내놨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 우리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한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조건은 안보입니다. 그런데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이후에 우리 국군통수권자들에게 뚜렷하고 강한 안보의식이 없습니다.”
중국과 미국이라는 양대 강국 사이에서 우리 안보영역을 확대해야 하고, 이를 위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북한의 호전적 행태가 극단적 사태로 치닫지 않도록 비대칭적 군사력을 앞세워 이를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북한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이 미국 본토까지 날아갈 때가 되면 미국 역시 특단의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긴장감 속에서 우리 역시 ‘핵무장’이라는 옵션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당장 핵을 보유하거나 전략적 핵무기를 배치하자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양한 방안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시장 자본주의의 부작용, 중소기업 활성화가 해답 = 최근 재벌 총수들이 잇따라 정경유착의 논란에 빠졌다. 전경련이 사실상 해체되면서 앞으로 재계와 정부가 가야 할 길을 물었다. 그는 주저 없이 “시장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예로 들며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앞세웠다.
“전경련 회원사가 내는 회비 가운데 75%는 5대 재벌이 냈어요. 매우 기형적 구조가 아닌가요? 상황이 이쯤 되면 경제인들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냥 몇몇 재벌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이리저리 휘둘리기 좋은 조직이 되는 것이지요.”
그는 이러한 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중소기업의 활성화를 꼽았다. 실제 김 이사장은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의 이사장직을 맡아 경제와 과학 분야에서 얻은 다양한 경험과 연륜을 바탕으로 경기도 중소기업의 성장과 기술 지원에 앞장설 생각이다.
“여전히 국가경제에 대한 기여도가 높은 쪽은 대기업입니다. 고용이나 매출, 수출 잠재력을 봐도 그렇지요. 하지만 진정 살 길은 중소기업 활성화입니다. 이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가지고 ‘고부가 가치’ 제품을 많이 개발하고 시장을 넓혀 가면 대기업에 치중된 집중도가 분산되게 되지요. 이렇게 되면 경제 자립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걸 지원하자는 게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의 역할입니다.”
결국 김 이사장이 강조한 바는 정치권의 자성(自省)과 안보의 자강(自强), 경제 자립(自立)이었다. 아울러 사회는 자치의식, 시민은 자유의지, 그리고 교육은 인격교육이 되어야 하는 등 모두 우리가 직접 이루어내야 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말은 이제까지 우리가 국가의 생존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본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반성이다.
헌정 사상 유례없는 혼돈의 시간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권이 바뀌는 과도기, 세대 갈등으로 번진 분열, 북핵 문제를 둘러싼 강대국과의 힘겨루기, 부의 양극화 등 난제도 산적해 있다. 그가 강조한 자성과 자강, 자립은 국가의 근간인 동시에 이 시점에 우리 모두 결코 지나칠 수없는 지혜의 메시지이다.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은
지난 1월 출범했다. 경기도의 경제와 과학을 책임지던 경기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와 경기과학기술진흥원을 하나로 통합해 효율성을 끌어올리겠다는 취지로 출범했다. ‘경기도 비즈니스와 과학기술 통합지원 플랫폼’이라는 기관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목을 받았다.
창업과 기술지원은 물론 마케팅 관련 교육까지 지원하며 서민경제의 부활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추구하고 있다.
#김진현 이사장은
193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언론계에 입문, 동아일보 기자와 논설주간, 동아방송 보도국장 등을 지냈다. 이후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 한국국제조세협회 창립이사를 거쳐 1990~1993년 제13대 과학기술처(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을 역임했다.
서울시립대 총장과 과학기술기획평가원 이사장, 세계평화포럼 이사장, 무역협회 연구자문위원장 등을 맡았다. 2012년 국민원로회의 위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언론계과 학계, 행정 관료까지 거치는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 경제와 과학의 대표 지성으로 자리매김해왔다. 지난달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이사장으로 선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