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봄은 꽃 속에 저 바람 속에 술잔에

입력 2017-04-20 10:37 수정 2017-04-20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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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서울 성북구 일대를 걸으며 골목마다 길마다 화사하게 물든 봄을 만끽했다. 북촌의 박인환 집터에서 상허(尙虛) 이태준 고택을 지나 길상사에서 멈춘 건 경내 북카페 ‘다라니 다원’에서 목을 축이기 위해서였다. 도심 속의 참선 도량으로 서울의 명소가 된 길상사. 그곳엔 시인 백석(白石)의 연인으로, 자신이 소유한 1000억 원대의 대원각을 법정(法頂) 스님에게 시주한 김영한(1999년 작고) 님을 닮은 야생화들이 힘껏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처녀치마, 깽깽이풀, 노루오줌, 홀아비꽃대, 민들레에 고사리까지…. 전날 내린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변영로) 때문인지 곱고 우아한 향기가 매우 짙었다.

우리 아파트에도 라일락 꽃망울들이 콩알만 한 주먹을 펴고 보랏빛 향을 자랑하고 있다. 라일락이 필 때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라틴곡 ‘베사메무초(Besame mucho)’이다. “베사메 베사메무초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 지던 밤에/ 베사메 베사메무초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고교 시절, 성악가 출신 가수 고(故) 현인 씨의 독특한 창법을 따라 턱을 부르르 떨며 혀 짧은 소리로 부르곤(노랫말의 의미도 모른 채!) 했다. 리라꽃이 라일락이라는 것은 대학에 가서야 알았다.

‘리라꽃’의 원어 lilac(리락)은 ‘푸르스름하다’는 뜻의 아라비아어에서 왔다. 프랑스어로는 릴라(lilas), 영어 이름은 라일락(lilac)이다. 순우리말은 수수꽃다리. 송이처럼 피어나는 작은 꽃 무더기가 수수꽃을 닮아 얻은 이름이란다. 꽃 모양이 한자 ‘丁’ 자와 비슷해 ‘정향(丁香)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결하고 매혹적인 향만큼이나 아름다운 이름이다.

라일락 중에서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미스김라일락’의 원조도 수수꽃다리이다. 1947년 미군정청 소속 식물채집가 엘윈 M. 미더(Elwin M. Meader)가 북한산 백운대의 바위 틈에서 야생 수수꽃다리 종자를 채취해 미국으로 가져간 뒤 원예종으로 품종을 개량한 것이 바로 미스김라일락이다. 당시 미더가 자신을 도와준 비서의 성(姓)을 따서 붙였으니, ‘다문화’ 이름인 셈이다.

나무와 꽃을 연구하는 지인은 “우리 자생종만 수수꽃다리이고, 라일락은 ‘서양 수수꽃다리’”라고 말한다. 실제로 수수꽃다리는 서양의 라일락보다 키가 작고 꽃과 잎이 앙증맞다. 꽃 색깔도 라일락보다 수수하고 향 또한 은은하다.

요즘 꽃향내를 머금은 봄바람에 싱숭생숭하다는 이들이 많다. 그러고 보니 봄바람도 예쁜 이름을 여럿 갖고 있다. 보드랍고 화창한 ‘명지바람’, 시원하고 가볍게 부는 ‘산들바람’, 솔솔 부는 ‘실바람’…. 정겨운 어감만큼이나 손끝으로 느끼고 싶다. 하지만 봄바람은 변덕이 심해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 옷섶을 파고드는 ‘살바람’과 ‘소소리바람’은 “봄바람에 여우가 눈물을 흘린다”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차고 매섭다.

두보는 시 ‘江畔獨步尋花(꽃을 찾아 홀로 강가를 거닐다)’에서 “강가를 덮은 꽃이 내 마음 마구 흔드는데 / 그 아름다움 말해줄 데 없어 미칠 것 같구나 / 남쪽 마을 술친구 찾아 허겁지겁 달려갔더니 / 열흘 전 술 마시러 나가고 빈 침상만 남았네”라고 노래했다. 꽃에 취해 한달음으로 친구 집에 간 두보. 시인은 그날 벗을 못 만난 허망함에 술을 얼마나 마셨을까? 나를 찾아올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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