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는 1주일 전 ‘일자리 전성시대를 열자’라는 제목의 정책건의서를 대선 후보들에게 보냈다. 경총은 5대 핵심 정책방향으로 △활기찬 시장경제 △공정하고 유연한 노동시장 △상생의 노사관계 △효율적 일자리 정책 △지속 가능한 사회보장안전 시스템을 제시했다. 이에 대한 대선 후보들의 반응이 궁금하고 경제 전반에 걸쳐 거침없이 쓴소리를 계속해온 박병원(朴炳元65) 경총회장의 말도 듣고 싶어 지난달 27일 경총회관으로 찾아갔다.
△건의서에 대해 반응이 좀 있던가요?
“없어요. 사실은 늘 하던 얘기이고 실천에 옮겨지는 게 없으니 관심을 가져 달라고 한 건데 별 반응이 없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과거와 달리 총체적 공급 과잉입니다. 그런데 경제상황이 얼마나 어렵고 일자리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정치권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제일 다급한 과제가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 청년 일자리 만들기인데 구체적인 정책이 나온 게 없어요.”
대선 후보들은 경제공약을 짜면서 박 회장에게 간접적으로 자문을 했고, 그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말을 해주었다. 옳은 정책을 채택한다면 누구든 상관없다는 생각에서다.
△공공부문 고용이나 벤처 창업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공무원 증원은 돈 벌어 세금 내는 일자리가 아니라 세금을 거둬서 쓰는 일자리라 한계가 있고 지속 가능성 문제가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 벤처 창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 공약의 맹점은 의미 있는 일자리 수를 만들기까지 10~20년 걸리는 점입니다. 하나는 너무 초단기적이고 하나는 너무 장기적이라 현실적으로 어렵지요.”
△그러면 뭘 해야 합니까?
“민간 기업들이 세금 내는 일자리를 자발적으로 만들겠다고 하는 걸 어떻게 해 주겠다는 얘기가 빠졌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호텔은 학교에서 200m 안에 못 짓고, 케이블카는 산양(山羊) 때문에 안 되고. 빅데이터 산업은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못 하고, 해외 수출하는 스마트팜 농업 사업은 농민의 영역이라고 막고 있습니다. 그동안 된다, 안 된다 하며 허송세월했던 걸 다 되게 하겠다, 안 되는 게 없는 나라 만들겠다, 중국이 일자리 만드는 일은 우리도 1년 내 되도록 하겠다, 이런 공약을 기대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공무원 늘리든지 4차 산업혁명으로 늘리든지 해야지요.”
그래서 그는 지지하는 후보가 없다. 투표 당일까지 누구를 찍을지 우왕좌왕할 것 같다고 한다. 답답하다는 말이 이어진다.
“제조업에서 온 세계가 부러워하는 성공을 거둔 나라가 왜 농업과 서비스업에선 성공하지 못하는지 반성하고, 국제 경쟁력이 있는 농업 서비스업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걸림돌 중 하나가 땅 문제입니다. 뭘 하나 하려 하면 우리나라는 땅값이 전 세계에서 거의 최고로 비싼데 땅을 사라고 합니다. 마음대로 사서 해도 수지가 맞을 동 말 동 한데, 땅 사서 하려 하면 수도권 규제로 안 되고, 그린벨트라 안 되고, 농지 전용 금지 때문에 안 되고, 임야 문화재 보호 때문에 안 되고…. 안 되는 이유가 수두룩합니다. 서비스업도 제조업을 키울 때처럼 부지를 마련해놓고 투자를 유치하러 돌아다녀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만 일자리 만들기가 어려운 건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인구의 2%만 농업에 종사하면 식량 생산에 문제가 없고 15% 정도가 제조업을 하면 전 인구가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는 데 지장이 없는 세상입니다. 인공지능(AI)으로 모든 산업 분야에 생산성이 더 높아지면 마지막엔 인구의 20~30%가 할 일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관광과 엔터테인먼트산업, 즉 노는 거로 일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국내에서의 경쟁만 생각하고 불리하면 무조건 반대합니다. 다른 나라는 놀고 있나요? 다른 나라에서 하는 일은 우리도 가능하게 해줘야 추가적인 일자리가 생겨납니다.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담보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니 대한민국은 지금 무능국가(無能國家)가 아니라 불능국가(不能國家)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경총 회장을 맡으면서 더 강해진 건가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경총은 기업과 경영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노총과 상반되는 의견을 내놓는 게 정상인 걸로 다들 생각하는데, 대한민국에서 경영자나 기업에 이로운 거 제안하면 들어줄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제안은 어떻게 하면 청년고용을 늘리느냐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실업자를 위해서라도 노동시장이 유연해지면 결과적으로 우리도 반사이익을 누릴 것 아니냐 하는 차원에서 접근방식을 바꾼 겁니다. 경총은 경영자 이익을 대변하기 이전에 취직하지 못한 젊은이들을 대변하려 합니다.”
△일자리 문제는 노동개혁과 직결되는데요.
“경직된 노동법을 개혁해야 합니다. 유연성 개별성 자율성을 원칙으로 취직한 사람과 취직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 핵심입니다. 지금 법체계는 취직하지 못한 사람들의 희생 위에 기존 취직자들만 과보호하고 있어 해고가 불가능합니다. 또 모두에게 하나의 단체협약과 하나의 취업규칙을 일률적으로 적용해 기득권을 침해하지 않고 개선하기가 어렵습니다. 채용과 해고를 더 자유롭게 하고, 개별적 근로협약이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개별 근로자들이 원하는 것, 취직 못한 사람들이 원하는 걸 해주자는 거지요.”
△결국 정치의 역할이 크겠군요.
“우리 정치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안 보이는 건 아예 못 봅니다. 한노총 민노총 등 노총의 조직과 표는 눈에 보이지요. 잘 안 보이고 기회가 적은 사람들을 챙겨줘야 할 텐데 정치인들은 갈등을 증폭시킬 뿐 조율하고 해소하는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작은 갈등이라도 보이면 하던 일도 중단합니다. 2013년 고용상 연령차별 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정년연장법)을 개정해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면서 ‘임금체계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19조 2항)고 명시했지만 임금피크제도 노조가 반대하고, 성과연봉제도 반대하고,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은 ‘나도 반대한다’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고친 법을 부정하는 것은 취직한 사람 눈치만 보고 취직 못한 사람들에 대해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거지요. 이런 식이면 누가 대통령이 돼도 1년 안에 국민들이 실망하고 정부가 흔들흔들 할 수 있습니다.”
△법인세를 내리려 하는 미국과 달리 우리 대선 후보들은 앞다퉈 인상을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이에 대한 견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법인세율은 시대마다 나라마다 다른데, 올려야 하는지 낮춰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올리는 게 이익이면 다른 나라는 왜 안 올릴까요? 물건값을 많이 올리면 이윤이 남지만 안 팔리고, 값을 낮추면 많이 팔리지만 남는 게 없습니다. 법인세 인상은 물건값을 올리면 돈을 더 많이 번다는 말인데, 그런 확신이 있다면 올리라는 거지요. 이미 법인세 하나 가지고 달라질 상황이 아닙니다.”
△대선 후보들은 재벌개혁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행위는 재벌이든 아니든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가차 없이 처벌해야지요. 그러나 그런 재벌의 행태가 지배구조 때문에 나왔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진단입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거의 기관 투자자가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소액주주의 권한을 강화한다지만 소액주주는 힘이 없습니다. 잘못된 행위는 개인을 징벌하면 되지 경영권 자체를 위협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경영을 잘못하면 나라가 어떻게 하기 전에 주주들이 알아서 징벌합니다.”
일자리 대책을 비롯한 박 회장의 생각은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살리는 경제활동을 강조했던 사마천(司馬遷)의 철학에 닿아 있는 것 같다. 사마천은 “소매가 긴 옷을 입어야 춤을 잘 출 수 있고, 돈을 많이 가져야 장사를 잘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의 ‘소매가 긴 옷’은 누가 짓는 것일까.
대선을 앞두고 그는 요즘 더 바쁘다. 칼럼 강연 인터뷰를 통해 많은 발언을 하고 있다. “그렇게 평론만 하지 말고 정부에 들어가서 일을 하지 그러느냐, 대통령 당선자가 부르면 가겠느냐”고 묻자 생각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다 말했으니 옳다고 생각하면 자기들이 하면 된다”는 것이다.
현재 문화예술위원인 박 회장은 2015년 세계무용축제 조직위원장으로도 활동했던 문화인이다. 마지막으로 문화 진흥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국가가 문화예술 진흥을 한다는 건 오산입니다. 문화예술계도 지독한 공급 과잉 상태인데, 수요 개발이 너무 안 돼 있어요.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감상 중심으로 초중고 교육을 바꾸면 그 국민들이 나중에 1년에 시집 한 권은 사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모두가 문화예술의 공급자라도 될 것처럼 교육하면서 점수화까지 해 음악 미술에 대한 거리감과 혐오감만 키워 내보내니 소비 수요의 저변이 확대되지 않고 문화예술 진흥이 안 되는 겁니다. 일률적 실기교육을 중단하고, 어느 날 그림이 보고 싶고 음악이 듣고 싶고 연주회라도 가고 싶어지는 국민을 키워내야 합니다.”
공동취재 김유진 기자 eugene@
박병원 회장 약력
△1952년 부산 출생 △경기고, 서울대 법학과 졸 △서울대 대학원 법학석사, 미국 워싱턴대 경제학 석사 △행정고시 17회 △재정경제부 차관(2005년) △우리금융지주 회장(2007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2008년) △전국은행연합회 회장(2011년) △경총 회장(2015년∼) △문화예술위원회 위원(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