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술부인(鵄述夫人)은 신라 제18대인 실성왕(實聖王·재위 402~417)의 딸이자, 박제상(朴堤上)의 아내이다. 제상은 삼국사기에는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며 파사 이사금의 5세손이라고 하여 박씨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에는 김씨로 전한다. 제상은 눌지왕 대의 삽량주(歃良州, 지금의 경남 양산)의 지방관이었다.
실성왕은 신라 17대 내물왕(奈勿王·재위 356∼402)의 아들 미사흔(未斯欣)과 복호(卜好)를 일본과 고구려에 각각 인질로 보냈다.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해온 실성왕은 마침 이웃 나라에서 인질을 원하자 원년(402)에 미사흔을 왜국에 보내고, 11년(412)에 미사흔의 형 복호를 고구려에 보냈다.
실성왕이 죽은 후에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왕(訥祗王·재위 417∼458)이 즉위하였다. 눌지왕은 미사흔과 복호를 돌아오게 하고 싶었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그 일에 적합한 자로 추천한 이가 제상이었다. 제상은 우선 사신으로 고구려에 들어갔다. 고구려에서 복호를 데려올 때에는 무사히 함께 올 수 있었다. 눌지왕은 매우 기뻐하면서 왜에 있는 미사흔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제상은 곧바로 집에 들르지도 않은 채 왜로 가는 배를 탔다.
치술부인이 뒤늦게 왜로 출발한 남편의 소식을 접하고는 부리나케 율포(栗浦, 지금의 울주)까지 쫓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제상은 왜에 가서 거짓으로 신라왕이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였기에 도망 왔다고 하였다. 이후 제상은 기회를 엿보아 미사흔을 탈출시켰으나 고구려에서와 달리 자신은 끝내 신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제상은 미사흔을 탈출시킨 대가로 고문 끝에 처형당했다. 눌지왕은 제상의 공을 치하하여 그의 아내를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하고, 그의 딸을 미사흔의 부인으로 삼았다.
제상의 이야기는 설화와 신화로 남았다. 그런데 주인공은 제상이 아니라 그의 부인이다. 제상이 왜로 떠날 때 치술부인은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넘어져 통곡하였는데, 그 넘어져 울던 모래사장은 장사(長沙)라고 일컬어졌다. 또한 넘어진 부인을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 지명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하였다. 오랜 뒤에 치술부인이 제상이 사무치게 그리워서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몸이 돌로 굳어 망부석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치술부인은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고, 그를 위한 사당(祠堂)이 세워졌다. 또한 치술령 정상의 은을암에는 박제상 부인의 혼이 새가 되어 그 동굴에서 조금씩 쌀을 흘려보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당시 신라 사람들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제상보다 남편을 향한 애통함에 애간장이 녹아나던 치술부인의 심정에 더 공감하였다. 신라인들의 공감과 바람 속에서 치술부인은 치술신모가 되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