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요(薛瑤)는 당나라에서 태어난 신라 이주민 2세이다. 아버지는 설승충, 혹은 설영충인데 당 고종 때 신라에서 당나라로 이주했다. 설요의 묘지명(墓誌銘)에는 신라왕 김씨의 후손인데 신라왕이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에게 ‘설’국을 식읍(食邑)으로 봉해주고 설을 성씨로 삼게 했다고 하였다. 설승충은 태종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당에서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이 되었다. 좌무위장군은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즉위 전 당나라에서 받았던 것으로 외국인에게는 최고위직이었다. 설요는 좌무위장군인 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15세 되던 해 설요는 뜻하지 않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아버지 설승충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설요는 돌연 머리를 깎고 출가를 했다. 설요가 왜 비구니가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좌무위장군이었던 아버지라는 울타리가 사라지면서 이주민으로서의 삶이 어려워졌을 수도 있다. 혹은 아버지의 죽음에 인생무상을 느끼고 구도의 길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이후 6년을 설요는 절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설요는 돌연 환속을 결정했다. 그리고 하산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구름의 마음이여 맑고 곧음을 생각하노니[雲心兮思淑貞]
동굴 죽은 듯 고요함이여 아무도 보이지 않네[寂寞兮不見人]
요초의 꽃다움이여 향기로움을 생각하노니[瑤草芳兮思芬蒕]
아 어이할까나 이내 젊음을[將奈何兮是靑春]
‘반속요(返俗謠)’, 즉 세속으로 돌아오면서 쓴 노래라는 뜻이다. 사람 구경하기도 힘든 적막한 산사 생활에서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보고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당시 설요는 21세였다. 설요는 어린 시절 미모가 뛰어나 선자(仙子)로 불렸다고 한다. 얼굴이 아름답고 시를 쓸 정도로 감성이 풍부했던 설요로서는 적막한 산사 생활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산 후 설요는 병부상서인 곽진(郭震)의 소실이 되었다. 곽진은 고위 관리이면서 시인이기도 했다. 곽진은 시를 이해하는 설요를 매우 아꼈다. 693년 2월 17일 설요가 통천현(通泉縣) 관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곽진은 매우 슬퍼하며 고국이 멀어 도달하지 못할까 하여 통천현 혜선사(惠善寺) 남원에 빈소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리고 ‘등유주대가(登幽州臺歌)’로 유명한 문사 진자앙(陳子昻)으로 하여금 설요의 묘지명을 짓게 하였다. 진자앙이 쓴 설요의 묘지명이 진자앙의 문집을 비롯한 여러 문헌 자료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설요는 이주민 2세로 태어나 출가를 했다가 환속(還俗)하고 이후에는 소실로 사는 등 굴곡진 삶을 살았다. 여성에게는 거의 문자생활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에 설요는 여성으로서 드물게 시를 썼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뿐만 아니라 설요가 쓴 시는 오랫동안 여성에게는 금기시되었던 청춘의 본능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