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심하게 외로움을 느끼면 우두커니 앉아 있기가 쉬운데 울컥 마음을 가누기 힘들어지면 또한 노래 한 가락을 부른다. 내가 들어도 너무 애절하다고 느끼면 노래를 걷어치우고 잠들어 버린다. 그렇게 부르는 노래가 딱 하나 ‘봄날은 간다’이다.
시인들이 모여 놀면 반드시 나오는 노래이지만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노래가 또한 ‘봄날은 간다’이다. 장사익 선생도 애간장이 타게 부르고 조용필 가수도 복장 터지게 부르는 노래이지만 나도 나름으로 내 앙가슴을 부여잡고 부르며 속을 게워내곤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 혼자 부르면 기막히게 잘 부르는 것 같은데 사람들 앞에서 부르면 그게 그거다. 그래서 나는 혼자 노래 부른다. 더러 ‘부용산’도 ‘해운대엘레지’도 부르지만 역시 내 노래는 ‘봄날은 간다’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그것도 집이 빚에 넘어가고 서울 변두리에서 몇 해를 보낼 때, 아버지의 생신(生辰)이던가 우리 가족들 밥상에 막걸리가 놓여 있었다. 오늘 밤은 울어도 된다는 엄마의 허락같이 막걸리가 아버지의 손에 들리고 언니와 내 주발에도 막걸리가 부어졌다.
아버지가 먼저 마시고 우리도 따라 말없이 마셨다. 두어 번 그렇게 돌았다. 엄마가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한 잔도 잘 못 마시는 아버지가 벌써 세 잔째다. 엄마가 팔을 잡은 것이다.
아버지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면서 고복수의 ‘타향살이’를 불렀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그쯤에서 노래가 그쳤다. 목울대가 덜덜 떨리고 이미 아버지의 볼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밥상은 거의 통곡 수준이었다. 모두 울었다. 그때 왜 그렇게 슬펐을까. 세상의 비극이 온통 우리 집에만 내려 쏟은 것 같은 그런 밤이 지금도 나의 기억에는 있다.
아버지의 통곡 노래를 따라 아버지를 위로한답시고 내가 ‘봄날은 간다’를 이어 불렀다. 나는 ‘봄날은 간다’가 아니라 ‘봄날은 온다’라고 고쳐 부르며 아버지의 손을, 어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 아버지의 손도 어머니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온다’라고 하면 어쩐지 우리가 원하는 날이 올 것 같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우리에게 봄날은 꼭 올 낍니다.” “내 니 노래 처음 듣는다.” “그래, 올 끼다.” 어머니가 답했다.
아버지의 노래는 지금도 가끔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한다. 왜 그렇게 오래 눈물이 흘렀는지…. 울음은 밥상으로 번져 오래 밥상 끝이 울었다. 우리 집엔 바다의 파도와 산의 굽이굽이 능선과 골 깊은 계곡과 가도 가도 끝없는 하얀 길이 있었다. 그래도 ‘가족’의 사랑이 있어 각자 자기 무게를 안고 살아가는 것일 게다. 가끔 ‘봄날은 온다’를 부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