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재벌 개혁이 경제민주주의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새로운 경제질서를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재벌 개혁이 경제민주주의의 출발인 건 맞지만 향후 경제민주주의는 하도급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자영업자로 표현되는 다수 국민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가야합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7일 서울 중구 상의회관에서 열린 CEO 조찬 간담회에서 새 정부의 경제민주주의의 방향성을 밝히며 그 출발은 재벌 개혁이 될 것이라고 다시 한번 대기업을 저격했다. 특히 한국 경제에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며 대기업의 자발적 개선에 속도를 내줄 것을 당부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과거 성장을 주도한 대기업에 의한 낙수효과가 사라진 상황에서 대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고쳐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낙수효과 모델이 한계에 왔다”며 “성장의 과실이 빠르게 확산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다시 잇는 작업을 하는 데 공정위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와 동시에 다수의 국민의 구매력이 성장동력으로 작용하는 분수효과가 있도록 투트랙 전략으로 가는 것이 정책 방향”이라고 덧붙였다.
재벌 개혁의 주요 목표는 경제력 집중 억제와 지배구조 개선으로 나뉜다. 김 위원장은 “경제력 집중 억제는 적은 범위에 그룹에 엄격하게 적용하고, 지배구조 개선은 기업규모와는 관계 없이 넓은 범위에 적용해야 한다”며 “공정위는 이 목표에 합리적으로 접근하는 고민을 할 것이고 법제도 개선을 위한 신중한 노력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벌 개혁의 방법 측면에서 김 위원장은 기업들의 자발적 변화가 선제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4대 그룹 전문경영인에게도 말씀드렸듯 스스로가 모범적인 사례를 자발적으로 만들어내면 좋겠다”며 “2, 3차 협력업체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점을 고민해달라”고 전했다.
다만 김 위원장은 이 같은 자발적인 변화에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기업들의 자발적인 변화를 최대한 기다리겠지만 한국 경제에 주어진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며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말을 인용해 “반드시 정부가 해야 할 일과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할 부분을 구분하기 위해 냉정하고, 신중하게 판단할 것이고,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되는 부분에 관해선 책임지고 민주주의 틀에서 수행하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김 위원장은 재벌 개혁과 함께 중소기업의 자체 경쟁력 강화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중소기업의 발전을 위해 공정위가 반성하고 혁신하겠다”면서 “나아가 정부의 보호 지원도 필요하지만 중소기업 스스로의 자정 노력도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김 위원장은 사업자 단체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공정위를 비롯한 범정부 차원에서 중소기업의 공정한 경쟁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이에 상응해서 재계, 특히 사업자 단체에서 스스로 공정한 경쟁 기회를 조성하는 자율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사업자 단체는 회원사의 이익을 공정하게 대변하는 이익 단체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고, 회원사 중 사회기대와 어긋난 기업이 있다면 자율규제 기구로서의 기능도 해야 한다”며 “만약 이게 안되면 전국경제인연합회와 같은 사태가 반복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공정위의 전속고발권 폐지가 점진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전속고발권이 언젠가는 전면 폐지될 것”이라며 “하지만 한꺼번에 폐지하는 방식은 어렵다는 것이 공정위의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전속고발권은 공정거래 관련 사건에 대해 공정위의 고발이 있어야 기소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전속고발권이 적용되는 법률은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대규모유통업법, 가맹사업법, 대리점법, 표시광고법 등 6개다. 하지만 공정위가 대기업 고발에 소극적이란 비판이 있어 제도 개선이나 폐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 위원장은 “급격한 변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보완책을 마련하면서 갈 것”이라며 “다수가 공감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고 법 폐지뿐 아니라 공정위의 행정집행을 고쳐야 하고 민사소송 제도도 활성화해야 하는 등 매우 복잡한 이슈”라고 설명했다.
한편 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일부 언론에서 ‘총수급이 아니면 대화를 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 것과 관련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에 갔을 때 일부 언론에서 김상조는 총수급이 아니면 대화를 하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기사가 났는데 제 의견을 듣고자 했던 모든 분들을 다 만났다”며 “모든 자리에는 어디나 가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모든 기업의 결정은 굉장히 세밀한 정보에 기초해서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기업의 밖에 있는 사람이 제한된 정보로 결정을 지적하면 기업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며 “제가 문제제기 하는 만큼 저는 기업의 설명 들을 의무가 있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