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오너와 경영진들은 갑자기 왜 오뚜기냐고 질문할 수 있다. 제대로 된 기업의 홍보팀이라면 오뚜기가 초대된 이유를 알 것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갓(god)뚜기’ 광풍이 분 것이 오래전 일이니 말이다. 홍보팀 말고도 사내에 ‘용감한’ 사회적책임(CSR)팀이 있었다면 오뚜기가 새 정부에서 주목받게 될 것이고, 그 비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미 예측하고 보고했을 것이다. 물론 이 보고가 임원진의 장벽을 넘어 경영진과 오너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은 별개다.
오뚜기가 초대된 것은, 이른바 ‘착한 기업’ 열풍 덕분이다. 오뚜기는 상속세를 제대로 내고,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제품의 가격을 서민의 눈높이에 맞추고, 25년간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의 치료를 위한 사회공헌을 묵묵히 해왔다.
물론 오뚜기가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을 완벽하게 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뚜기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하지 않는 기업 중 하나다. 오뚜기가 환경, 사회, 지배구조와 관련된 어떤 이슈에 연루되어 있고,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는지 이해관계자는 파악할 방법이 별로 없다. 오뚜기의 함영준 회장이 고(故) 함태호 명예회장으로부터 약 3000억 원가치의 주식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이에 상응하는 상속세 1500억 원을 납부하겠다고 밝힌 것은 주목할만하다. 하지만 이 자금을 만들기 위해 함영준 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비상장계열사들과 오뚜기 간의 내부거래가 증가한다면, 이는 그리 건강한 모습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함영준 회장이 상속세를 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오뚜기가 오뚜기라면으로부터 라면을 구입해 판매한다면, 오뚜기의 소액투자자들의 이익을 훼손할 수 있다. 오뚜기의 오래된 숙제인 상호출자 문제도 넘어야 할 산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오뚜기 열풍은 국내의 사회적책임(CSR) 환경이 뉴노멀(새로운 정상상태ㆍNew Normal)을 맞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회적책임의 뉴노멀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사회공헌만 잘한다고 해서 기업의 평판이 개선되지 않는다. 흔히 기업들은 사회공헌을 진정성 있게 수행 중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의 환경에선 체계적이고 기본적인 사회책임이 동반되지 않는 사회공헌은 아무리 진정성이 있다 할지라도 꼼수로 읽힐 뿐이다. 아르바이트 노동에 대한 임금을 미지급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소외계층의 자립을 돕겠다고 기부를 한다면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맹점에게 각종 로열티와 리뉴얼을 빙자한 인테리어를 주기적으로 강요해서 손실을 안기면서 가맹점 직원의 역량강화를 위한 교육을 제공한다고 하면 이게 사회공헌으로 이해가 될까? 각 기업은 모든 기업에게 부과되는 기본적인 책임과 각 업종에 부과되는 특수한 책임들이 있다. 이 책임들을 외면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업은 많지 않다.
둘째, 시민이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에 대해 직접 평가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과거엔 언론 기능을 언론사가 독점했다. 그러나 이젠 시민 모두가 미디어다. 물론 언론사가 가지고 있는 취재력은 개인에게 없다. 하지만 개인과 개인이 연결된 세상의 네트워크는 특정한 소식을 최단시간에 폭발적인 이슈로 만들어낸다. 이 개인들은 기업의 윤리의식과 사회적책임, 사회공헌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이들은 좋은 기업의 소식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유하고, 나쁜 기업과 이 기업으로 인해 발생한 억울한 피해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들 중에는 기업이 경품을 내건 캠페인에 참여해 경품만 받고 빠져나오면서 기업을 조롱하는 소비자도 있고, 기업의 보도자료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전문가도 있고, 각 기업의 내부자도 있으며, 어떤 기업이 촉발한 이슈의 당사자도 있다. 이 네트워크를 해석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냥 사회적 책임 활동을 잘 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네트워크로 인해 억울한 오해와 불신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네트워크는 꾸준히 발달하고 있다. 기업활동에 대한 감시자가 소수 언론에서 다수의 국민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셋째, 기업의 구성원들은 사회적책임의 철학과 미션을 공유하는 공동체다. 그 동안 사회적책임 활동을 보고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되어주는 지표들이나 각 기업이 보고하는 사회적책임의 내용들은 남의 일 같았다. 그 이유는 사회적책임이 위법 행위나 침해 행위를 적시할 수 있는 법적 구속이 없는, 일종의 사회적인 규범이었기 때문이다. 각 기업은 규범상의 사회적책임의 내용들 중 일부를 회사의 정책으로 수용하고, 이들에 대한 관리 체계를 운영해왔다. 이 정도만으로도 대외적으로는 사회적책임을 잘 이행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사내의 임직원들은 그런 게 있다더라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지만 일상적인 업무를 하는 과정에선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사회적책임과 연결된 각종 기업내의 행동강령과 지침이 있더라도, 매출과 실적의 압박 속에서 대부분 무력화되었다. 그리고 이런 관행의 누적이 여러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다. 가맹점주에게 폭언을 퍼붓는 영업사원의 얘기가 아니다. 이 폭언을 옆에서 듣고 침묵하는 동료와 상사에 대한 얘기다. 사내에서 사회적책임에 위배되는 다양한 사건과 사고가 발생함에도 직원들은 침묵한다. 이 침묵은 기업 내에 잠복하고, 조직의 문화를 바꾸고, 기업을 위기에 빠트린다. 위기는 잘못된 조직문화 속에서 누적되어왔다. 그러니 사회적책임의 성공은 기업이라는 공동체의 진화다.
오뚜기를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오뚜기를 과하게 칭송할 필요도 없다. 다만 시대가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을 바꾸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으면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오뚜기를 초대한 게 아니다. 오뚜기를 갓뚜기로 바꾼 사람들이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게 팩트다.
고대권 코스리(한국SR전략연구소) 미래사업본부장 accrea@kos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