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밥에도 격이 있다?

입력 2017-08-0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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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하고 정겨운 밥집을 찾아 음식을 주문한다. 음식이 나오면 향부터 즐긴 후 고고하게 젓가락질을 한다. 밥알 하나하나까지도 꼭꼭 씹어 아주 천천히 맛의 세계로 빠져든다. 눈도 지그시 감는다. 일본 만화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井之頭五郞)이다.

혼자 먹는 밥이 궁상맞다고? 누군가의 방해를 받지 않고 혼자서 여유롭게 음식을 먹는 그의 모습에선 궁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큰 행복이 느껴지며 꼴깍! 내 입안에도 군침이 고인다.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을 떠올려 보자. 나는 대학 시절 여름방학 때 충남 논산에서 농촌활동(농활) 중 먹은 기승밥이 지금껏 최고의 맛으로 남아 있다. 모를 심다가 논두렁에 앉아 보리밥에 열무김치를 넣고 고추장에 슥슥 비벼 먹었는데, ‘대령숙수(待令熟手·조선시대 궁중 남자 조리사)’가 차려낸 최고의 한정식도 따라오지 못할 맛이었다. 기승밥은 모를 내거나 김을 맬 때 논둑에서 먹는 밥이다. 모내기를 하다가 들에서 먹는 밥은 못밥이다.

그러고 보니 밥을 일컫는 말이 참 많다. 우선 먹는 이의 격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한다. 임금의 밥은 수라이다. 윗사람이 먹으면 진지, 하인이나 종이 먹는 밥은 입시라고 낮잡아 말했다. 거지가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빌어먹는 건 동냥밥이다. 귀신이 제삿날 먹는 밥은 메, 초상난 집에서 죽은 사람의 넋을 부를 때 저승사자한테 대접하는 밥은 사잣밥이다. 어린아이가 먹는 밥은 맘마이다.

밥은 먹는 장소와 때에 따라서도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산천(山川)의 신령에게 제사할 때 노구솥(놋쇠나 구리로 만든 작은 솥)에 지은 밥은 노구메이다. 드난밥은 남의 집에 붙어 살면서 얻어먹는 밥이다. 죄수가 감옥에서 좁은 구멍을 통해 받아 먹는 밥은 구메밥으로, “감옥살이한다”는 말을 “구메밥을 먹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구메는 구멍의 옛말인데, 몇몇 합성어에는 아직 형태가 남아 있다. 작은 규모로 짓는 농사인 ‘구메농사’, 널리 알리지 않고 하는 혼인인 ‘구메혼인’ 등이다. 구메가 반복된 ‘구메구메’는 ‘남이 모르게 틈틈이’라는 뜻이다.

밥을 국, 반찬 없이 그냥 먹는 건 강다짐이다. 반찬 없이 먹는 맨밥은 매나니, 소금만을 반찬으로 먹는 밥은 소금엣밥이다. 대궁밥도 있는데, 남이 먹다 남긴 밥이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웃어른들은 배가 덜 차도 밥그릇을 싹싹 비우지 않았다. 밥에 김치 등 반찬 국물을 묻히지도 않았다. 남은 음식을 기다리는 아랫사람을 위한 배려였다.

약밥·인절미를 만들거나 술밑(술의 원료)으로 쓰려고 찹쌀이나 멥쌀을 물에 불려서 시루에 찐 밥은 지에밥이다. 이를 ‘고두밥’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지에밥만이 표준어이다. 물론 아주 되게 지어져 고들고들한 밥은 고두밥이 맞다.

밥을 표현하는 말이 많은 건 그만큼 밥이 소중하기 때문이리라. 먹을 것이 풍족한 지금도 우리에게 밥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다. “밥 한 알이 귀신 열을 쫓는다”, “밥이 보약”, “밥심으로 산다” 등의 속담처럼 밥은 곧 몸을 살리는 영양이다. 찌는 듯한 더위에 지쳐 입맛마저 잃었다면 “언제 밥 한번 먹자”고 말했던 사람들과 마주 앉아 밥 숟가락을 뜨자. 건강은 물론 소중한 사람까지도 챙길 수 있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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