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4일. 삼성전자가 하만인터내셔널인터스트리(하만)을 80억 달러에 인수·합병(M&A) 한다는 소식에 전 세계 증시가 출렁였다.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하만의 주가는 전일 대비 25% 급등했다. 주요 외신은 삼성의 하만 인수는 자동차와 정보통신기술(ICT)을 결합하면서 자율주행차나 커넥티드카 등 스마트카 시장으로 도전하는 발판이 마련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인수 규모는 국내 기업의 해외기업 인수합병 사상 최대다.
9조 원대의 하만 인수를 진두지휘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하만 인수 이후 자율주행, 인공지능 과련 기업을 추가로 인수해 5년 안에 자율주행 플랫폼을 내놓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하지만 25일 이 부회장의 1심 선고에 삼성의 M&A 시계는 사실상 멈췄다.
이 부회장이 구속된 이후부터 삼성은 대규모 신규 투자나 M&A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의 뛰어난 실적은 수년 전 대규모 투자와 M&A를 통해 만들어놓은 시스템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글로벌 경쟁 속에서 ‘현상유지’는 곧 ‘도태’를 의미한다.
◇글로벌 입지 추락 불가피… 경영권 간섭 우려도 = ‘24년 만에 인텔을 끌어내린 반도체 강자’, ‘애플 누른 삼성’ 등이 올해 2분기까지 삼성 앞에 붙은 수식어였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실형이 선고되며 ‘비리기업’ 낙인이 찍혀 그동안 쌓아온 브랜드 이미지와 글로벌 지위에 타격을 받게 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이 발표하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50’에서 누락됐다.
삼성이 미국의 ‘해외부패방지법(FCPA)’ 적용 대상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FCPA는 미국 기업이 해외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거나 회계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처벌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1977년 제정한 법이다.
미국 증시에 상장돼 있거나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공시하게 돼 있는 기업 또는 기업의 자회사가 적용 대상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상장기업은 아니지만 2008년 해외부패방지법 개정으로 법 적용 범위가 확대돼 제재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만약 FCPA 제재 대상으로 확정되면 과징금을 내야 하며, 미국 연방정부와의 사업이 금지되는 등 미국 내 공공 조달사업에서 퇴출당하게 된다.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영국, 브라질 등 여러 국가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강도 높은 부패방지법을 적용하고 있다.
또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경영권 간섭이 확대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재 삼성 총수 일가의 지분율이 20%인 반면, 외국인 지분은 50%가 넘는다. 재계 관계자는 “단기 차익을 좇는 투기자본 등이 삼성의 리더십 부재 상황과 불안정을 틈타 공격을 해올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대규모 투자·신사업 진출 미래먹거리 찾기 ‘올스톱’ = 이 부회장은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며 경영 전면에 나섰다. 실용주의를 앞세워 글로벌 시장을 뛰며 대규모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미국 실리콘밸리 등 정보통신기술(ICT) 업계 및 글로벌 자동차 업계와 긴밀히 소통하며 다양한 인수합병(M&A)으로 미래 먹거리 사업을 육성해왔다.
2015년 2월 마그네틱 결제 기술을 보유한 ‘루프페이’를 인수해 ‘삼성페이’의 성공을 이끌었고, 지난해 10월 인공지능(AI) 플랫폼 개발업체 ‘비브랩스’를 인수해 ‘빅스비’를 만들었다. 삼성의 기술 축적을 기다리기보다 ‘축적된 시간’을 사들이며 미래먹거리 찾기에 나섰다.
하지만 미국 하만 인수 발표 후 대형 인수·합병(M&A) 진행 성과는 전무하다. 삼성 넥스트 등을 주축으로 소규모의 투자는 진행되고 있지만 기존 사업에 대한 추가적인 판단에 그치는 수준이다.
삼성증권의 초대형 투자은행(IB) 사업 진출에도 제동이 걸렸다. 금융 당국은 10일 대주주인 이 부회장의 재판 절차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삼성증권의 발행 어음 사업 인가 심사를 보류했다. 이 부회장이 실형을 받으면서 삼성증권은 대주주 결격 사유로 발행어음 사업 기회를 잃었다. 형 집행 완료일로부터 5년 동안 새로운 사업에 대한 인가 심사도 받을 수 없다.
월스트리트저널(WSJ)등 주요 외신들은 “구형(12년)된 형량보다 짧은 형량이지만 실형 선고가 삼성의 불확실성의 시기를 연장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