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자동판매기 밀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전국적으로 약 500만 개 이상의 자판기가 설치돼 있다. 일본 국민 23명당 약 1대의 자판기를 가진 셈이다. 일본 자판기제조협회에 따르면 일본 자판기의 연간 매출 총액은 600억 달러(약 67조5120억 원)가 넘는다.
일본이 이처럼 ‘자판기 천국’이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미국 경제전문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가 최근 그 원인을 4가지로 정리했다.
첫 번째는 비싼 인건비 때문이다. 일본은 익히 알려졌듯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뚜렷한 나라다. 미국 코네티컷대학교의 윌리암A.맥어컨 경제학 교수는 일본의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가 노동력 부족과 인건비 상승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2008년 자신의 거시경제학 저서에서 일본의 자판기는 노동력 부족 문제의 해결책으로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일본 고베대학교의 로버트 페리 경제학 교수 역시 1998년 자신의 연구 논문에서 일본 소매업자들이 자판기를 유통 수단으로 활용하는 이유는 높은 인건비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논문에 “급속한 경제 성장 이후 일본의 인건비는 가파르게 치솟았다”며 “자판기는 별다른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고 단지 정기적으로 현금을 비워내고 물품을 채워넣는 일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두 번째 배경은 비싼 부동산 가격이다. 페리 교수는 “자판기는 1평당 소매점보다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한다”고 밝혔다. 일본의 인구는 1억2700만 명에 달하는데 국토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크기와 비슷하다. 일본 국토의 약 75%가 산으로 덮여 있어 인구 밀도는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편이다. 일본인 중 93%가 도시에 거주하는 것을 고려하면 부동산 가격은 비쌀 수밖에 없다.
낮은 범죄율도 자판기 설치율을 높였다. 일본은 살인율이 매우 낮은 나라에 속한다. 동시에 2010년 유엔(UN) 범죄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세계에서 강도 비율이 가장 적은 국가로 나타났다. 낮은 범죄율 덕에 자판기 훼손 비율 역시 낮다. 일본국립관광기구에 따르면 자판기 안에 최소 몇만 엔의 현금이 있고, 주로 어두운 골목에 많이 설치돼 있음에도 자판기가 깨지거나 훼손되는 일이 거의 없다. 페리 교수는 “미국의 자판기 회사들은 노변에 덩그러니 자판기만 놓는 것은 고려조차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에서 현금 결제 비율이 높다는 점이 자판기 보급률을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 물론 최근에는 카드 결제가 가능한 자판기가 늘고 있지만, 초기에 자판기 보급이 활발했던 것에는 일본인들이 동전을 많이 가지고 다닌 게 한몫했다. 도쿄에서는 아직도 지하철 표를 신용카드로 살 수 없다. 또 신용카드를 받는 매장도 가맹점을 제외하면 많지 않다. 2015년 일본의 현금 결제 비율은 20%에 육박해 국제결제은행이 조사한 26개국 중 1위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