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10월부터 보유자산 규모를 단계적으로 줄이기로 하면서 본격적인 ‘양적 긴축’을 선언했다. 이는 미국 고용시장이 완전고용에 가까운 등 경제에 대한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연준이 금리인상의 핵심 전제로 삼았던 물가는 정체된 상태다. 경기는 견조한 상태에서 낮은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는 이런 수수께끼같은 상황은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가 안은 공통 과제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처럼 아무리 돈을 풀어도 오르지 않는 물가의 원인을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의 논문을 인용해 24일 보도했다.
‘닥터 둠’으로 불리는 루비니 교수는 13일 ‘잃어버린 물가 상승의 수수께끼’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강한 성장과 낮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수수께끼의 조합 원인을 설명한다면 선진국들이 겪고 있는 공급 측면의 충격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논문은 경제학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이례적인 금융 완화에 힘입어 일본 미국 유럽의 수요가 되살아나 경제가 개선되고 있는데 정작 물가는 낮은 수준이다. 이 배경에는 신흥국에서 싼 물건이나 서비스가 유입되고 있는 것과 노동자들의 발언권 저하로 실업률이 낮아져도 임금과 물가가 상승하기 어려운 구조로 경제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
연준은 20일 최신 경제 전망에서 성장률을 끌어 올리는 한편, 물가 전망을 낮췄다. 일본도 실업률은 20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하락하는 등 인력난이 심각하다. 그럼에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0.5%로 낮아 일본은행은 물가 전망 하향을 반복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이 내놓은 보고서에서는 6월 물가 상승률이 1% 미만인 국가는 15개국에 이른다. 아일랜드 등 4개국은 마이너스 권에서 맴돌고 있다. 성장 기대가 높은 인도의 6월 물가 상승률은 1.5%로 8년 만의 최저 수준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17년 신흥국의 평균 물가 상승률이 4.6%로 선진국과의 격차가 사상 최소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루비니는 낮은 인플레이션의 가장 큰 원인으로 저유가를 꼽았다. WTI(서부 텍사스산 중질유)는 2014년 중반 배럴당 100달러에서 최근에는 50달러대로 반토막났다. 이 여파로 2016년 6월까지 4% 대였던 사우디아라비아의 물가 상승률은 2017년 1월에는 크게 감소해 지금도 마이너스 권에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저유가와 신흥국 통화 강세가 원인이라면 낮은 인플레이션도 일시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지만 루비니의 지적처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다이나믹한 구조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거시 경제의 통설에 따르면 경기 회복으로 고용이 늘면 인플레이션 압력도 높아지게 마련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임금 성장이 둔해 가계의 구매력이 충분히 높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선진국의 임금이 오르지 않는 이유에 대해 BIS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클라우디오 보리오는 “세계화와 기업이 더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영향이 크다”고 분석했다. 임금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기업은 인건비가 낮은 해외로 생산을 이전하고 있다.
또한 국제 분업이 가파르게 진행되면서 아시아 등지에서는 단순 노동이 점점 기계로 대체되고 있다. 예를 들어 대만 훙하이정밀공업의 조립 작업은 고도의 자동화로 비용이 절감돼 제품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 이는 광범위하게 통합된 경제에서 선진국 신흥국을 불문하고 물가 동조화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공급력의 문제도 있다. 경제 발전에 따라 중국 등 ‘세계의 공장’인 신흥국에서 생산 기지가 급성장해 거대한 공급력이 태어났다. 한편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전에는 7~8% 대였던 신흥국의 성장률은 5% 미만으로 둔화, 결과적으로 대규모 공급력에 걸맞은 수요가 없는 ‘공급 과잉’ 상태가 계속된다.
전자상거래(EC)의 확대가 글로벌 물가 침체의 원인이라고 보는 의견도 많다. 미국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릭 리더 최고투자책임자는 “이런 현상의 주범은 스마트폰”이라고 역설한다. 같은 제품이라도 오프라인 매장보다 할인율이 큰 인터넷 쇼핑몰 등으로 고객이 넘어가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이런 전자상거래의 폭발적인 보급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상거래의 보급은 기업 생산활동의 저변을 크게 넓히는 한편 디플레이션 압력을 강화한다고 리더는 지적했다.
신흥국 같은 경우는 이런 경기 국면에서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 여지가 있지만 신흥국 같은 경우는 장기 금융완화로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크게 뛰어 버블을 막기 위해 금융 정상화로 선회하고 있다.
이처럼 경제에 대한 체감온도 차이가 선명한 가운데 금융정책을 졸속으로 긴축하면 자칫 경제 활동을 냉각시킬 수 있기 때문에 세계 각국은 물가 동향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고 신문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