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선선하고 하늘도 파랗다. 한국의 가을은 이래서 상쾌하다. 그런데 사나흘 걸러 한 번씩 중국발(發) 황사가 나타나 우리의 쾌청한 하늘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곤 한다. 물론,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는 미세먼지도 없진 않지만 중국 때문에 피해를 보는 부분에 대해서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이웃 나라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대기오염을 비롯한 제반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19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하늘은 정말 푸르렀다. 오죽했으면 이희승 선생이 우리나라의 하늘을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 출렁일 듯, 저렇게 청정무구를 드리우고 있건만”이라고 표현했을까?
청정무구는 ‘淸淨無垢’라고 쓰며, 각 글자는 ‘맑을 청’, ‘깨끗할 정’, ‘없을 무’, ‘때 구’라고 훈독한다. 맑고 깨끗하여 때라곤 없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은 그렇게 때 하나 없이 파랗고 맑았다. 어린 시절, 가을 운동회 날 아침에 만국기 너머로 바라보던 하늘은 그야말로 창공이었다.
창공은 ‘蒼空’이라고 쓰며 각 글자는 ‘푸를 창’, ‘하늘 공’이라고 훈독한다. 글자 그대로 ‘푸른 하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즈음 신문이나 잡지에서 더러 ‘푸른 창공’이라고 쓴 것을 발견한다. 창공이 이미 ‘푸른 하늘’이라는 뜻인데 다시 ‘푸른’이라는 말을 붙여야 할 이유가 없다. 이는 ‘역 앞 광장’을 ‘역전(前) 앞 광장’이라고 잘못 사용하는 경우와 같은 사례이다.
우리는 무심코 이런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폭음(爆音) 소리’도 그러한 예의 하나이다. ‘爆音’이 이미 뭔가가 ‘터지는 소리’인데 다시 ‘소리’라는 말을 덧붙여야 할 이유가 없다. ‘푸른 창공’은 결코 창공을 강조한 표현도 아니다. 오용일 따름이다. 보다 더 섬세하고 정확한 말을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