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칼럼] 상촌(象村) 선생을 생각하며

입력 2017-09-2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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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야비(野鄙)하고 누추(陋醜)하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하기야 그게 어찌 정치꾼들만의 모습일까. 야비와 누추를 합치면 비루(鄙陋)라는 말이 되겠지만, 자잘하고 좀스럽고 구차한 인간 군상(群像)은 사회 각계, 도처에서 쉽게 눈에 띈다.

그래서 좀 의젓하고 품이 넓고 존경할 만한 인물이 어디 없는지 자꾸 찾게 된다. 경건(敬虔) 정중(鄭重)하고 근엄(謹嚴)해서 장한 선비와 같은 인물, 그런 인물을 현실에서 만나기 어려우면 옛 글과 고전, 역사에서 찾을 수밖에.

최근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 선생의 글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났다. “한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기를 바라며 지은 문장은 지극한 문장이 아니며, 한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바른 인물이 아니다.”[爲文而欲一世之皆好之 非至文也 爲人而欲一世之皆好之 非正人也]

상촌은 월사 이정구, 계곡 장유, 택당 이식과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칭송되는 조선 중기 한문 4대가 중 한 사람이다. 아름다운 글이 참 많지만, 다음과 같은 한시 하나만으로도 문학사와 정신사에 길이 빛난다.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항상 그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한평생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 이지러져도 그 본래의 성질이 남아 있고/ 버드나무는 백 번 꺾이더라도 새로운 가지가 올라온다.”[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月到千虧餘本質 柳經百別又新枝]

앞에서 소개한 상촌의 지문(至文) 정인(正人)에 관한 문장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어떤 페친이 ‘문재인 대통령이 새겨야 할 글이네요’라는 댓글을 달았다. 이런 댓글을 붙인 것은 문 대통령이 모든 사람이 좋아할 일 위주로 국정을 운영하고, 높은 인기와 지지도에 묻혀 국민을 대하고 있다는 부정적 인식 때문일 것이다. 문 대통령을 뽑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탈(脫)원전 정책이나 노동개혁이 마음에 들 리 없고, 적폐 청산은 명분만 그럴듯할 뿐 실은 정치 보복, 전 정권 지우기일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한 시대의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정책과 정치는 없다. 국가 지도자는 한 시대의 인기와 지지에 매몰되면 안 된다. 최근 한국을 다녀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도 말했지만, 국가 지도자는 인기 없고 반대가 많은 정책이라도 먼 미래를 내다보고 추진해야 한다. 앙겔라 메르켈이 독일 총리로 4연임을 하게 된 것도 실은 슈뢰더의 개혁정치가 바탕을 깔아준 덕분이라고 하지 않던가.

다시 상촌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未曾有)의 격동과 혼란기를 겪었고, 선조, 광해군 대를 거치면서 유배와 귀양의 수난과 시련 속에 한 생애를 보낸 사람이다. 그리고 병도 어찌 그리 많았던지 눈과 귀가 어두워 거동이 부자유스러웠고 종기로 고통이 심했다.

하지만 상촌은 여유 있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의 종사관(從事官)이었던 상촌은 호서지방의 군민을 대상으로 쓴 격문에서 “나는 잘 모르겠다”라며 백성을 돌보지 않은 조정과 장군들의 잘못을 대신해서 반성하고 있다.

법정(法頂) 스님의 글에 “산다는 게 뭔가? 모르겠다. 어제는 알 것 같더니 오늘은 또 모르겠다”라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진정한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라는 말을 되풀이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촌은 매사에 자신이 넘치고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걸 알게 해 준다. 이런 인물 어디 없나? 경건 정중하고 겸손 근엄한 사람. 그의 글이 바로 지문이며 그가 바로 정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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