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뉴스에서 ‘증거인멸’만큼 자주 듣는 말도 드문 것 같다.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있어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는 뉴스가 바로 그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범죄 사실을 감추려 드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전직 대통령들과 국정원장 등 한 시대를 풍미하며 나라를 이끌었던 사람들이 다 진실을 덮으려 하고 있으니 사회 전체에 거짓 증언과 진실 왜곡의 못된 풍조가 퍼지고 있는 것이다.
증거인멸의 인멸은 ‘湮滅’이라고 쓴다. ‘湮’은 ‘잠길 인, 묻을 인’이라고 훈독하는 글자인데, 물 아래로 잠기게 하거나 땅에 묻어 버림으로써 드러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滅’은 ‘없앨 멸, 멸망할 멸’이라고 훈독하는 글자로,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湮滅은 드러나지 않도록 물속에 처넣거나 땅에 묻어버리거나 태우거나 녹여서 영원히 사라지게 한다는 뜻이다. 무서운 단어이다. 진실이 그렇게 영원히 잠기고, 묻히고, 소각되거나 용해되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이 세상에는 거짓만 남게 된다.
진실이 사라진 세상엔 억울한 사람이 넘치게 되고, 진실이 사라진 그 자리를 차지한 거짓은 끊임없이 거짓을 재생산하여 세상을 온통 불신과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차게 한다. 그러므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증거가 인멸되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엔 증거를 인멸한 일이 너무 많았다. 그것도 국가기관이 나서서 공공연히 인멸하였다. 당연히 억울한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것은 인멸된 줄 알았던 증거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증거들 앞에서 떨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우리 사회에 정의가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에 대한 믿음이 든다. 복도 지은 대로 받아야 하지만 죄는 더더욱 지은 대로 받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