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208. 배봉기(裵奉奇)

입력 2017-09-2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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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잊혔던 최초의 위안부 피해 증언자

8월 14일 ‘세계 위안부의 날’은 김학순(金學順)이 1991년에 일본의 전쟁범죄로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세계 최초로 공개 증언한 것을 기리는 날이다. 그보다 앞서 1975년 10월에 ‘위안부’였음이 공개된 여성이 있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는 남지 않았다.

배봉기(裵奉奇)는 1914년 9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머슴 일을 했고 어린 남매를 건사하며 남의집살이를 했던 어머니는 배봉기가 6세 때 집을 나갔다. 배봉기 또한 7세 때부터 ‘민며느리’라는 명목으로 남의집살이를 했지만 자주 쫓겨왔기 때문에 아버지의 화를 사기도 했다. 17세와 19세에 했던 두 차례의 결혼은 가난이 덫이 되어 실패했다.

그 후 10년간은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았다. 1943년 늦가을, 함남 함흥의 어느 농가에서 일하고 있을 때 낯선 남자 둘이 찾아왔다. ‘일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에 가자고 했고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배봉기에게 그 말은 유혹이었다. 흥남역에서 서울역, 부산항을 거쳐 일본 모지항(門司港)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모인 조선인 여성이 60여 명이었다.

그 가운데 51명이 1944년 10월, 연합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오키나와(沖縄)에 도착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의 각 지역으로 여성들을 배치했고 배봉기 등 7명은 도카시키(渡嘉敷)로 갔다. 일본군은 민간인의 빨간 기와집을 빼앗아 임시로 방 7개를 만들고 위안소로 사용했다. ‘아키코’가 된 배봉기는 그곳에서 ‘위안부’가 되어야 했다.

연합군의 공습이 점점 심해지는가 싶더니 1945년 3월 25일 위안소가 폭격 당했다. 탈출 과정에서 ‘위안부’ 3명이 사망했다. 배봉기 등은 일본군 제3전투부대와 함께 계곡으로 피신했다. 전쟁을 견디는 동안 배봉기는 배가 너무 고파서 죽음이 무섭지 않을 정도였다.

1945년 8월 18일 항복한 일본군과 함께 배봉기는 산을 내려왔다. 포로수용소에서도 홀로 벗어나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았다. 1972년 오키나와가 미군 점령에서 벗어나 일본 영토로 복귀될 때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채 살아오던 배봉기는 강제 퇴거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3년 사이에 신청을 하면 특별체류허가를 내준다고 하였고, 출입국사무소의 심사를 받는 과정에서 배봉기가 ‘위안부’였음이 드러났다.

배봉기는 살던 곳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 ‘위안부’였음을 밝혀야 했다. 주변인들의 지속적인 소통과 돌봄 속에서 배봉기는 자신의 삶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님을 깨달아갔다. 1989년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사망했을 때는 “왜 사죄도 않고 죽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배봉기는 평생 두통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면서 살다가 1991년 10월 오키나와 자택에서 별세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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