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의 항암신약 ‘올리타’(성분명 올무티닙)의 경쟁 약물로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성분명 오시머티닙)가 지목된다. 올리타와 타그리소 모두 ‘3세대 EGFR TKI 계열’이라는 동일 기전의 약물이고,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승인받은 적응증도 ‘이전에 EGFR-TKI로 치료 받은 적이 있는 T790M 변이 양성 국소 진행성 또는 전이성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치료’로 같다.
국내 시판승인도 올리타(2016년 5월13일)와 타그리소(2016년 5월19일)는 유사한 시기에 이뤄졌다. 올리타는 임상2상시험을 완료한 이후 조건부승인을 받았고 타그리소는 임상3상시험을 완료한 이후 시판허가를 받았다는 점이 작은 듯 보이면서도 큰 차이다.
올리타 입장에선 타그리소와 악연이 있다. 지난해 9월 베링거인겔하임으로부터 권리가 반환된 가장 큰 이유가 타그리소 때문으로 분석하는 시각이 많다. 타그리소가 올리타보다 개발 속도가 빠르고 우수한 임상결과를 도출했다는 이유에서다. 올리타가 글로벌 임상2상시험의 문 턱을 넘지 못하는 사이 타그리소는 미국에 이어 유럽 관문을 통과했다. 글로벌 무대에서는 올리타가 타그리소를 뒤쫓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타그리소가 자칫 약가협상 결렬로 시장 철수도 고민해야 하는 위기에 놓였다. 한국 보건당국과의 약가협상에서 한미약품이 효과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전략으로 타그리소에 비해 건강보험 급여권 진입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는 진단이 나온다.
◇아스트라제네카, '타그리소' 약가협상 난항..한미 '올리타' 저가전략 여파
17일 업계에 따르면 한국아스트라제네카는 최근 건강보험공단과의 ‘타그리소’ 약가협상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추가 약가협상을 진행 중이다. 당초 지난 13일 약가협상 마감시한이었지만 자정까지 진행된 협상에서 절충점을 찾지 못하고 추가로 1주일간 협상 시간을 갖기로 했다.
제약사가 개발한 신약이 건강보험을 적용받으려면 식약처의 허가 이후 보건당국과 약가협상을 타결지어야 한다. 올리타와 타그리소 모두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급여평가위원회로부터 급여적정성 평가를 받은 후 건보공단과 약가협상에 돌입했다.
올리타와 타그리소 모두 국내 허가 이후 비급여로 판매 중이지만 약가협상을 거쳐 건강보험 급여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되면 환자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투여받을 수 있게 된다.
한미약품은 약가협상이 시작되자 당초 예상보다 저렴한 가격을 제시하는 전략을 구사하며 일찌감치 보험급여 진입을 예고했다. 한미약품이 제시한 올리타의 희망 약가는 아스트라제네카가 제시한 타그리소의 가격보다 절반 가량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건보공단은 신약의 비용 대비 효과 및 해외 가격, 유사 질병을 치료하는 대체 의약품의 가격 등을 검토해 적정 보험약가를 책정한다.
올리타와 타그리소 모두 기존에 없는 치료제라는 점에서 대체약물과의 약가 비교는 할 수 없다. 다만 동시에 약가협상이 시작된 동일 기전의 약물이라는 점에서 올리타와 타그리소의 약가는 비교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한미약품이 예상보다 낮은 수준으로 올리타의 가격을 제시하자, 건보공단은 아스트라제네카가 제시한 타그리소의 약가를 수용하기 어렵게 됐다. 동일 계열 약물일 뿐더러 적응증도 똑같은 2개의 약물인데도 큰 격차의 가격으로 책정하는 것은 불합리할 뿐더러 건강보험 재정 낭비를 초래한다는 비판이 불가피하다.
건보공단의 약가협상지침에 따르면 ‘대체가능 약제의 총 투약비용을 감안한 금액’이라는 항목이 협상 참고가격 중 하나로 명시됐다. 올리타와 타그리소의 적응증이 동일해 올리타가 타그리소의 대체가능 약제로 분류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최근 건강보험 급여가 등재된 면역항암제 ‘옵디보’와 ‘키트루다’는 같은 시기에 약가협상을 진행하면서 보험약가도 투약 비용 기준으로 유사 수준으로 책정된 바 있다.
옵디보100g의 보험상한가는 132만6800원이고 키트루다100mg은 286만412원의 보험상한가가 책정됐다.
옵디보와 키트루다의 적응증이 일치하지 않아 투약 비용의 단순비교는 힘들지만 두 약물이 동시에 승인받은 흑색종에 대한 투약 비용으로 보험약가를 비교할 수 있다.
흑색종 환자의 경우 옵디보는 3mg/kg 2주 간격 투여, 키트루다는 2mg/kg 3주 간격 투여하도록 승인받았다.
만약 몸무게 100kg의 흑색종 환자가 12주 동안 옵디보 또는 키트루다를 투여받는다고 가정할 때, 옵디보는 총 100mg 3개를 2주 간격으로 6번 투여받는다. 옵디보100mg 18개의 가격은 2388만2400원이다. 키트루다는 100mg 2개를 3주 간격으로 4번 투여받는다. 키트루다 100mg 8개의 가격은 2288만3296원으로 옵디보와 거의 차이가 없다.
환자의 몸무게나 질병 진행 상태에 따라 투약 비용은 차이가 날 수도 있지만 같은 상태의 동일 질환 환자들이 부담하는 약값은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건보공단은 아스트라제네카에 타그리소의 희망 가격을 올리타와 같은 수준으로 낮출 것을 요구하는 방안이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인 셈이다.
만약 아스트라제네카가 올리타와 큰 차이의 가격을 고수할 경우 약가협상은 결렬돼 국내 국내 보험급여권 진입이 힘들어진다. 이 경우 타그리소의 국내 시장 철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통상 다국적제약사들은 해외 약가와의 균형을 이유로 한국 시장에서만 낮은 가격을 수용하기보단 시장 철수를 선택하기도 한다.
실제로 2개의 유사 약물이 비슷한 시기에 약가등재절차가 진행되면서 희망 약가의 격차가 커 일부 약물만 보험급여가 적용된 사례가 있다.
지난 2014년 아스텔라스의 ‘엑스탄디’와 얀센의 ‘자이티가’ 등 2개의 전립선암치료제가 약가협상을 벌였지만 엑스탄디만 약가협상을 통과, 보험급여를 인정받았다. 당시 엑스탄디가 자이티가에 비해 크게 낮은 가격을 제시하면서 자이티가는 협상이 결렬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미약품의 올리타 저가 전략은 그동안 국내제약사들이 신약의 약가 우대를 요구했던 것과는 상반된 행보다. 그동안 국내 제약업계는 원 개발국에서 약가를 낮게 받으면 해외에서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며 높은 가격을 인정해달라고 건의해왔다.
지난해 보건복지부는 국내 보건의료 기여도가 높고 임상적 유용성을 개선한 신약에 대해 약가를 높게 책정해주는 새로운 약가제도를 시행한 것도 이러한 제약업계의 지속된 요구가 반영됐다.
◇한미, '올리타' 저가 공급으로 명분과 실리 확보
한미약품이 올리타의 저가 전략을 펼친 이유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국산신약을 낮은 가격으로 출시하면서 환자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 기존에는 국내제약사가 개발한 신약은 대부분 대체약물이 있는 후발약물에 불과해 환자들이 절실하게 공급을 요구하는 약물은 아니었다.
올리타의 경우 폐암 환자가 더 이상 쓸 약이 없을 때 사용하는 약물이어서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면 환자들에겐 희소식이다. 건강보험 재정 절감에도 기여할 수 있다.
한미약품이 올리타의 고가 등재를 목표로 보건당국과 줄다리기를 하는 것보다는 낮은 가격으로 신속하게 시장에 진입해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빠른 속도로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겠다는 노림수도 엿보인다.
만약 약가협상 결과 올리타만 급여 등재되고 타그리소의 국내 시장 출시가 불발되면 올리타는 국내 시장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거머쥐는 실속도 챙기게 된다.
타그리소의 유럽 및 미국 시장 발매와 베링거인겔하임의 권리 반환으로 올리타의 미국과 유럽에서의 성공 가능성이 낮아진 터라 국내에서 높은 약가가 선진 의약품 시장에서도 비싼 가격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한미약품은 폐암 환자가 많은 중국 시장을 주요 타깃으로 설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약품은 중국 제약사 자이랩에 올리타를 기술수출한 상태다.
현재로서는 건보공단이 타그리소의 보험약가를 올리타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으로 책정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스트라제네카 입장에선 타그리소의 희망 약가를 대폭 떨어뜨리거나 약가협상 결렬로 국내 출시 포기를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한국아스트라제네카 관계자는 “현재 타그리소의 약가협상이 진행 중이어서 세부 전략이나 내용을 말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