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태후(昭文太后)는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라고도 한다.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인 김경신(金敬信)의 어머니이다. 소문태후의 배우자, 즉 원성왕의 아버지는 일길찬(一吉飡) 김효양(金孝讓)이다. 소문태후는 박씨로, 창근(昌近) 이간(伊干)의 딸이다. 소문태후의 이름을 ‘삼국사기’에서는 계오부인(繼烏夫人)으로, ‘삼국유사’에서는 인O(仁O) 또는 지오부인(知烏夫人)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이름을 표기하는 방식의 차이 내지 오류일 뿐 동일인을 지칭한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37대 왕인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이 죽은 후에 김주원과 김경신 사이에 왕위를 둘러싼 쟁탈전이 벌어졌다. 결국 김경신이 승리하여 왕으로 즉위하였다. 김경신은 785년 즉위한 직후 고조부 법선(法宣), 증조부 의관(義寬), 조부 위문(魏文), 아버지 효양(孝讓)을 대왕으로 추봉하였다. 그와 동시에 어머니인 계오부인을 소문태후로, 아들인 인겸(仁謙)을 왕태자로 책봉하였다.
소문태후는 그의 남자 형제인 언적(言寂)과 여자 형제와 함께 경북 김천에 위치한 갈항사(葛項寺)에 동·서 삼층석탑 2기를 건립하였다. 동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석탑기(石塔記)에 의하면, 건립연대는 천보 17년, 즉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17년인 758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문황태후와 경신태왕(敬信太王)이라는 칭호가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탑을 건립한 것은 758년이지만, 기단부에 건립 이력을 새긴 것은 원성왕이 즉위한 이후였을 것이다.
또한 숭복사(崇福寺)의 석탑기에는 소문태후의 외숙이자 숙정왕후(肅貞王后)의 외조부인 파진찬 김원량(金元良)이 곡사(鵠寺)를 창건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원성왕이 죽은 후에 곡사는 원성왕을 모시고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이 되었다. 후에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이 885년에 곡사를 경주시 외동면으로 옮기고, 숭복사(崇福寺)로 개칭하였다.
이처럼 소문태후의 삼남매가 석탑을 건립하였는데, 그중 언적은 영묘사(靈妙寺)의 법사였다. 또한 소문태후의 외숙인 김원량은 원성왕을 추복하는 원찰이 되는 숭복사를 창건하였다. 신라인들이 절의 석탑을 건립하고,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을 창건하는 것은 현세를 초월한 신심에 의한 것이었다. 소문태후가 그의 형제자매와 함께 건립한 석탑 역시 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신라인이 불교 사찰 건립과 탑의 조성을 통해 간절히 바랐던 것은 살아 있는 이의 복과 죽은 이의 명복이었다. 간절한 기원의 끝에는 선업(善業)을 쌓아 성불(成佛)하고 부처님이 계신 이상 세계인 불국토(佛國土)에 가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불국토를 꿈꾸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자유였고, 평등이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