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비(趙妃·생몰년 미상)는 충선왕의 왕비이다. 상원군(祥原郡·황해북도 상원군) 사람으로 아버지는 역관(譯官)으로 크게 출세한 조인규(趙仁規), 어머니는 조온려(趙溫呂)의 딸이다. 1292년(충렬왕 18)에 세자 충선왕과 혼인하였다. 충선왕은 이미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으니, 1289년 혼인한 종친 서원후(西原侯)의 딸 정비(靜妃) 왕씨, 이듬해 결혼한 남양부원군 홍규(洪奎)의 딸 순화원비(順和院妃), 원에 체류할 때 맞아들인 몽골인 의비(懿妃) 야속진(也速眞)이 그들이다. 이후 충선왕은 1296년 원나라 진왕(晉王)의 딸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와 혼인하였다.
계국대장공주는 시집온 뒤 여러 후비 중에서도 특히 조비가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을 질투하였다. 그리하여 “조비가 공주를 저주하여 왕의 사랑이 없어지게 하였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원나라 황태후에게 보냈다. 또 얼마 후에는 대궐 문에 익명의 글이 붙었는데, “조인규의 처가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만을 사랑하게 하고자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저주하였다”라고 쓰여 있었다.
공주는 조인규 일가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고는 원나라에 사람을 보내 투서 사건을 알렸다. 원에서는 1백여 명 가까운 사람들이 와 사건을 조사하였다. 조인규의 처를 극히 참혹하게 고문하니 처가 고통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하였다. 조인규와 사위들은 원에 끌려가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으며, 조비 역시 원나라로 압송되었다. 또한 충선왕이 퇴위 당하고,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사건이 유명한 ‘조비무고사건’이다.
처첩 간의 질투는 극히 평범한 일인데, 이 때문에 왕위가 바뀌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다는 것이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는 사실 계국공주의 질투가 도화선이 되었을 뿐 그 이면에는 충선왕 부자의 알력 및 원나라의 이해관계 등이 복잡하게 얽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기화로 원은 정치 개혁을 꾀한 충선왕을 퇴위시킬 구실을 갖게 되었으며, 고려에 대한 정치 간섭을 한층 강화할 수 있었다.
이후 조인규는 석방되어 귀국하고 다시 벼슬에도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비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원나라의 영록대부 강절등처 행중서성평장정사(榮祿大夫 江浙等處 行中書省平章政事)인 오말(吳抹)에게 시집갔다. 이 혼인이 조비의 의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조비는 충선왕과 이혼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왕의 애정이 갑자기 식었을 리는 없지만, 이 사건으로 왕위까지 잃은 충선왕이 공주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녀를 가까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 나라의 왕비를 단지 질투에 의해 죄인으로 만들어 폐비하고, 심지어 원나라 남자와 결혼까지 시켜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약소국의 비애라 해야 할까? 조비는 고려왕조 5백년간 가장 불행한 왕비 중 한 명이었다 할 수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