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⑤ 명작엔 다 스토리가 있다

입력 2017-12-08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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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터리나 갈고, 손목시계를 겨우 분해·조립하는 정도이지만, 시계는 늘 관심 안에 있다. 딱히 시계를 좋아한다기보다 만년필과 시계는 닮은 점이 있어 시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시계 전문가들한테 묻는다.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시계는 어떤 거고 이유는 뭡니까?” 대답은 거의 한결같다. O시계가 튼튼하고 수리하기 편해서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수리가 편하다는 것은 전문가에게 해당되는 것이란 점이다. 전용 도구가 있고 수리 방법 또한 정확해야 하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O시계가 수리하기 편하다 해서 내가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좀 거리가 있는 물건이지만, 군 장비나 무기 전문가에게 최고의 소총을 물어보면 고장 나지 않고 다루기 쉬운 OO총이라 알려준다. 시계의 경우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대답이다.

만년필 역시 덜 고장 나고 수리가 편한 게 명작이다. 튼튼한 것을 꼽자면 파커51이 1등이다. 파커51은 부품이 골고루 튼튼한 만년필이다. 사람으로 치면 오장육부(五臟六腑)가 다 튼튼해 장수하는 것과 같다. 사실 파커51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초기 산에 장착된 잉크 저장장치는 몇 년 만에 고장 나는 문제가 있었다. 버큐매틱(vacumatic)이라 불린 이 장치는 복잡하고 수리도 쉽지 않았다.

당시 파커의 CEO는 케네스 파커였다. 지금으로 치면 만년필계의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이 복잡한 장치를 하루라도 덜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능을 유지한 채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파커사는 몇 년간 치열하게 연구했다.

드디어 1940년대 말 개선에 성공한다. 이 새로운 장치는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쉽게 잉크를 넣을 수 있게 만들어졌지만 고장 나지 않았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은 것처럼 명작 역시 이처럼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1941년 파커51을 선보인 케네스 파커.
▲1941년 파커51을 선보인 케네스 파커.

흥미로운 것은 파커51과 양 끝에 마주하는 명작 몽블랑 149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엉뚱하게도 1929년 펠리칸이 처음 만년필을 내놓을 때 시작된다. 이때만 해도 몽블랑은 펠리칸의 성공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펠리칸이 만년필을 만들 수 있도록 초기에 펜촉을 공급해준 곳이 몽블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펠리칸은 크게 성공한다. 펠리칸이 시도한 새로운 잉크 저장장치가 매우 우수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장치는 몽블랑이 먼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몽블랑은 이걸 무시했고 펠리칸이 가져다 성공한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 몽블랑은 텔레스코픽(telescopic)이란 잉크 저장장치를 내놓는다. 펠리칸 것보다 훨씬 더 잉크가 많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펠리칸 너희는 상대가 될 수 없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파커의 버큐매틱보다 복잡했다. 복잡하면 수리는 더 어렵기 마련이다. 초기 몽블랑 149엔 이 장치가 있었다. 이 장치가 계속되었다면 몽블랑 149는 명작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60년대 몽블랑은 이 장치를 버리고 펠리칸의 것을 다시 따라하게 된다. 살다 보면 별것 아닌 것에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울 때가 있다. 늦더라도 꺾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몽블랑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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