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로린 마젤의 곡예

입력 2008-03-0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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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린 마젤(Lorin Maazel)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최근 평양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북핵문제가 동북아시아의 민감한 외교•안보 현안으로 부상한 현 상황에서 뉴욕 필은 이른바 음악 사절단으로서 북에 갔다. 그러나 이 미묘한 시기에 북한이 그들에게 생소한 서양 클라식 연주단을 왜 불러들였는지 그 동기가 궁금해진다.

정치•외교적 상황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되기는 하지만, 클라식 애호가 입장에서는 뉴욕 필의 평양 연주는 약간은 의외적인 이벤트다. 애호가들은 서양 클라식 음악을 별로 접하지 못한 북한 주민들에게 클라식은 ‘생뚱스런’ 것이라 여긴다. 실제로 그럴 것이다.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은 평생에 정통 클라식을 한번도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클라식에 문외한일 수 있는 북한 주민을 위해 그 유명한 뉴욕 필이 북한에는 왜 갔을까. 그리고 북한 당국은 왜 서양 클라식을 연주하는 뉴옥 필을 초청했는지 의아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뉴욕 필이 북한에 간 것은 연주를 통해 북미 양국 간 관계를 보다 가깝게 하려는 친선방문의 의도로 이해된다. 일부 외교 전문가들은 뉴욕 필 평양 방문이 지난 70년대에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기 전에 탁구대회를 가진 것과 유사한 이벤트가 아닌가 하고 관측하고 있다. 미•중 양국이 핑퐁외교로 국교를 열었다면, 뉴욕 필의 평양 연주를 심포니외교라고 비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로린 마젤은 아마도 자신의 역할을 이처럼 북미 간 친선의 밑거름으로 간주하고 평양에 갔을지 모른다. 그는 평양에서 그의 생애 중 최고의 환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주회 청중들이 감격해서 눈물 흘리는 걸 보고 감동했다는 언급도 했다. 마젤은 자신의 평양 방문이 기대 이상으로 성과를 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언제 어디서든 순수하게 행동하는 게 별로 없다. 상대방을 기만하기 위해 고도로 의도되고 기획된 행동을 한다. 더구나 1인 독재하의 전제국가나 다름 없는 북한이 뉴욕 필을 초청한 것은 정치적으로 고도로 계산된 다목적 의도가 숨어있다 하겠다. 첫째, 현 상황에서 김정일은 북한이 핵공갈이나 치는 그런 깡패국가가 아님을 서방 세계에 알리려는 속셈을 갖고 있다. 이번 뉴욕 필 방문을 통해 북한은 주민들이 서양 클라식을 즐겨 들으며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즉 서방 세계와 다름 없는 그런 사회임을 대외에 알리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계 여론을 그들에게 호의적인 방향으로 전환시켜 6자 회담 등에서 보다 유리한 입장으로 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겠다. 물론 그 궁극 목적은 은닉한 핵탄두가 없다고 버텨서 핵협상을 그들의 의도대로 타결 짓도록 하려는 것일 게다. 둘째는 내부결속을 다지는데 있다. 북한 당국은 미국이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세계적인 연주단을 평양에 보내왔다고 주민들에게 선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보유한 핵에 미국이 겁나서 고분고분해졌다고 선전, 내부결속을 다지려하고 있을 게다.

과연 북한이 클라식을 즐겨듣는 상식이 통하는 나라일까. 연주회에 참석한 청중들은 모두 동원된 청중임을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이들 청중은 당국으로부터 미리 철저하게 지시받고, 그 지침대로 행동했을 터이다. 그들이 감격해 눈물 흘렸다는 것도 각본에 의해 그렇게 하라고 지시받았을 것이다. 철저한 감시와 통제 아래서 살고 있는 그들이 지침도 없이 자본주의 음악에 눈물을 흘렸다면 아마도 성치 못할 것이다. 철저한 국가 통제 아래 있는 북한을 우리가 서방의 자유분방한 잣대로 측정한다면 항상 어긋난 평가를 하게 된다. 서방식 잣대로 그들을 평가하면 그들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다. 그리고 그런 ‘순진한’ 접근방식으로는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의 진상을 알지 못한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정밀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부 서방 언론들과 평론가들은 뉴욕 필의 평양방문이 북•미 관계개선에 물꼬를 트는 한편 북한이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하려는 하나의 조짐으로 보고 있다. 과연 그럴까. 북한은 핵문제로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된 상황을 역전시키려는 공작 노력으로서 뉴욕 필을 평양에 초청했다. 그들이 국제사회의 건전한 일원으로서 역할하려고 뉴욕 필을 초청했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대내외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뉴욕 필을 교묘히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평가라고 봐야겠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이번 심포니외교는 실패한 외교다. 북한 당국이 뉴욕 필 공연을 자신들의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려는 여론 전환용 카드로 이용한 한, 미국이 의도한 바는 성취되지 않았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북한 각지에서는 여전히 굶주리고 억압받는 주민들이 소외된 폐쇄사회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는 현실이다. 평양의 선택받은 극소수만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고 주민의 90% 이상이 생존의 한계성에 도전받고 있다. 김정일이 진정 인민을 위한다면 90% 주민을 기아선상에서 헤매게 하고 자유를 얽매는 그런 反인간적 통치를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세계가 진정 인도주의를 지향한다면 선택받은 극소수만을 위하는 김정일 체제를 선택해야 할까, 아니면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90%의 주민을 위해야 할까.

로린 마젤은 그의 순수한 예술성을 누구를 위해 발휘하려고 평양에서 연주했을까. 그는 연주장에서 열렬히 환호한 청중들이 동원된 사람들이고 그들의 감정 표출마저 당의 철저한 지시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마젤은 미국의 선량한 시민의 심정으로 북한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순진하게도 북한 청중들이 그의 음악에 정말 감동한 것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북한은 외부 세계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김정일이 변하지 않는 한 변하지 않는다.

평양 연주가 끝난 뒤 마젤은 서울에 와서 연주회를 가졌다. 평양에서는 신세계 교향곡을, 서울에서는 운명 교향곡을 지휘했다. 남북한의 상징성을 찾기 위해서 이 곡들을 선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을 드나들며 음악 곡예를 벌여서 남북한과 미국의 친선관계를 호전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의 이 곡예가 한반도에 그리고 북•미 관계에 과연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지, 특히 북한에 어떤 긍정적 효과를 미쳤는지 검증할 방법이 없다. 오히려 북한의 치밀한 정치공작에 말려들어, 마젤이 광대가 되고 미국이 병신춤을 기획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든다.

클라식 연주단을 북한에 보낸 건 아무래도 북한 당국에 역이용당한 듯한 느낌이 든다. 차라리 그 돈으로 굶주리는 북한 주민에게 빵 한 조각이라도 보내주는 게 더 나았을지 모르겠다. 하루라도 빨리 북한 주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서양 클라식을 즐기는 그런 사회가 북한에 도래하기를 기대해본다.

최재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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