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칼럼] 이 풍진세상을 만났으니

입력 2018-01-09 11:09 수정 2018-01-09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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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는 언제까지 하는 걸까. 해가 바뀌고 1월 한 달 동안은 그렇게 하는 것 같다. 그러다 설날을 맞으면 또 이 인사를 한다. 이중과세(二重過歲)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어쨌든 신년 인사 기간은 길기도 하다. 복 많이 지으라는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주로 불자(佛子)들이 그러는 것 같은데 복을 짓다 보면 그 과정에서, 짓고 난 뒤에 스스로 복을 받게 될 것 같다.

나는 이번 연초에 “복 많이 받으셨지요?”라는 인사를 받고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복을 받는 게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내 손에 뭐가 들어온 것도 아닌데…. 그러다가 곧 우리의 전통적 인사법을 되새기게 됐다. 이건 말에는 영적인 힘이 있고, 세상일은 말한 대로 된다고 믿는 일종의 언령사상(言靈思想) 아닌가. 말이 씨가 된다.

덕담을 할 때도 이미 이뤄진 것처럼 하면 효험이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인사가 “새해 복 많이 받으셨지요? 축하드립니다” “부자 되셨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이런 것들이다. 건강이 좋지 않은 고모에게 보낸 숙종의 편지도 “새해에는 쾌차하셨다지요?” 이렇게 과거 확인형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요즘 감각에는 아무래도 어색하다. 남의 아이에게는 “그놈 참 밉게도 생겼네”라고 하는 게 전통적 어법이었다. 하지만 요즘 이렇게 말하면 싸움이 나기 십상이다. 이미 복을 받은 것처럼 성취를 확인하는 인사도 ‘누굴 놀리나’ 하는 불쾌감을 느끼게 하기 쉽다.

이런 인사는 부담스럽고,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는 상투적인 거 같아서 요즘은 “늘 건강 평안하시라”는 말을 애용한다. 평범하고 쉬운 말 같지만 평안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걱정이나 탈이 없어야 사람은 평안할 수 있고, 평안해야만 무슨 일이든 이루어낼 수 있다. 개인도 사회도 나라도 평안해야 한다.

12월 31일 제야음악회에서 장사익의 목소리로 “이 풍진세상(風塵世上)을 만났으니”로 시작되는 희망가를 들을 때 그런 생각이 더 절실했다. 젊어서는 이 가사를 멋대로 바꾸어 부르고, 친구들과 어깨를 겯고 밤거리에서 고래고래 합창도 했다. 가사의 실감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들은 노래는 좀 달랐다. ‘맞아, 그렇구나, 이 풍진세상을 잘도 살아왔구나, 앞으로는 어떤 세월에 어떤 삶이 펼쳐지는 건가, 아니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에 노래를 듣는 동안 회상(回想)과 감상(感傷)에 젖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삶의 행로와 진로를 바꾸는 것은 이미 늦었다. 그러기엔 너무 멀리 걸어왔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김명인의 시 ‘의자’의 한 구절인 이 대목은 이렇게 전개된다. “창고에서 의자를 꺼내/처마 밑 계단에 얹어놓고 진종일/서성거려온 내 몸에게도 앉기를 권했다/와서 앉으렴, 내 몸은/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소설가 이문구는 이 말을 그대로 따와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라는 작품집을 낸 바 있다.

그래서, 이제 추구하는 것이 휴식이고 평안일까? 그러나 그 시의 ‘너무’라는 부사에 아직 동의하기 어렵다. 여전히 더 서 있거나 더 걸어야 한다. 박철의 시집 ‘너무 멀리 걸어왔다’라는 말도 믿고 싶지 않다. 김남조의 ‘겨울바다’를 생각했다. “나를 가르치는 건/언제나 시간/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남은 날은 적지만/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기도의 문이 열리는/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기도하는 영혼’은 결코 못 되지만 지난해만큼은 마실 수 있는 건강, 남들을 보살피고 폐를 끼치지 않는 배려와 분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더 충실히 하는 치열함을 소망한다. 시간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면서 이 풍진세상을 무리 없게 남들과 더불어 잘 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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