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Too]“권력 관계 속에 성폭력 발생...미투운동, 성 평등 사회 만드는 계기”

입력 2018-03-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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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동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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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에서 시작한 ‘미투(#Me Too)’ 운동이 최근 문화예술계를 넘어 정치권까지 불어닥쳤다. 그동안 숨어있던 피해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최근 만난 대법원 산하 젠더법연구회 신임 회장 노정희(55·사법연수원 19기) 법원도서관장은 이에 대해 “그동안 수많은 피해자가 말하려다가 말고, 말했다가 묻히거나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봐 숨었는데 이제야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젠더법연구회는 여성, 아동 등 소수자가 겪는 법적 문제를 다루는 법원 내 최대 연구회다.

◇ “미투운동, 성평등한 사회 만드는 중요한 계기될 것”

지난 1월 안태근(52·20기) 전 검사장 성추행 의혹 폭로 이후 전 사회적인 미투 운동이 촉발됐다. 노 관장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고, 문제가 생겼을 때 법적으로 잘 대응할 것 같은 법조인이 즉각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점 등이 공감을 얻어 훨씬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고 풀이했다.

노 회장은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최근 이어진 폭로들은 권력자가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약자를 상대로 저지른 폭력이었다. 연극연출가 이윤택 씨와 배우 조민기 씨는 제자들에게 ‘왕’과 다름없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역시 사실상 ‘위계에 의한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폭로가 나왔다. 우리 사회 일부인 법조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직 내 성폭력이 발생하면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 피해자 상담, 가해자 처벌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정상적인 절차다. 노 관장은 그러나 “예전 사례를 보면 피해자는 문제를 제기한 뒤 주변 사람에게 미안해하고 조직에 누를 끼쳤다고 생각했다”며 “가해자는 대부분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사직했고 그 뒤 사건은 묻혔다”고 했다. 정작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가해자는 사라지고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끼는 피해자만 남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화해와 용서에 이르기 어렵고 피해에 상응하는 처벌이 이뤄졌다고도 누구도 느끼지 않는다”며 “무엇보다 (조용히 넘어가면) 제도와 문화가 바뀌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노 관장이 미투 운동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도 성평등한 조직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는 “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모두 존중받으면서 일을 하고 안전하게 거리를 돌아다니자는 것”이라며 “피해자가 용기 있게 발화했으면 그에 따라 피해자는 보호받고 가해자는 상응하는 처벌을 받고 용서를 빌어야 더 나은 조직 문화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노 관장은 “미미하지만 성평등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데 중요한 계기이자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진=이동근 기자 )
(사진=이동근 기자 )

◇ “소수자 보호...선출되지 않은 법관의 역할”

노 관장이 소수자에 관심을 기울인 지도 어언 18년째다. 2000년 설립된, 젠더법연구회 전신 ‘여성법 커뮤니티’ 때부터 활동했다. 소수자 보호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이유를 묻자 노 관장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법관으로서 당연한 역할”이라고 했다. 사법부는 정부, 국회 등 3부 가운데 유일하게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때문에 ‘민주적 정당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여론이나 선거 득표율에서 벗어나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사람들이 언제나 최후의 보루로서 법원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여성’과 ‘아동’은 그의 주요 관심 분야다. 여성과 두 딸 엄마로서의 정체성은 이런 관심의 배경이 됐다. 노 관장은 여성 문제 관련 법률 개정이나 해석을 다르게 해야 할 부분으로 ‘강간죄’ 구성 요건을 꼽았다. 현행법상 강간죄는 관계 시 ‘폭행’이나 ‘협박’이 있어야만 처벌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싫다’는 의사만 표시했을 때는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대법원 판례상으로도 강간죄로 처벌하려면 가해자 폭행과 협박으로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이거나 ‘항거가 현저히 곤란할 정도’여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법률적 허점 때문에 여성계와 법조계 일부에서는 강간죄 구성 요건을 피해자 ‘저항’에서 ‘동의’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른바 ‘비동의 간음죄’다. 폭행과 협박이 없어도 상대방 의사에 반해 간음하거나 성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 관장은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만 처벌을 받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지 문제”라며 “법의 공백이 있다”고 했다.

노 관장은 “강간의 위법성 정도에 따라서 법정형을 단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며 “차등 처벌하면 사회적으로 행위에 상응하는 처벌이 가능하고 위법한 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고 했다. 실제 미국이나 영국, 독일 등에서는 가해자 행위 정도와 피해자 동의 여부 등을 성폭력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아동 성폭력이나 성매매는 ‘성 착취’로 재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권력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2015~2016년 광주고법 전주재판부에서 형사합의부를 맡았던 노 관장은 최근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성 관련 사건 수가 증가하고 피해자 연령이 낮아지고 있는 상황을 우려했다.

최근에는 특히 직접적인 폭행과 협박이 없는 ‘그루밍’ 피해자들이 많다. 숙식을 제공하는 등 가해자가 피해자를 길들여서 성적 착취를 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40대 연예기획사 사장이 당시 15세였던 여중생을 여러 차례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1·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그러나 피해자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건을 파기환송하고, 결국 무죄로 확정했다. 이 때문에 노 관장은 현행 만 13세인 미성년자 의제 강간 기준 연령을 높이는 방안도 조심스레 제시했다. 스위스나 영국, 독일 등 대부분 국가의 의제 강간 대상 연령은 16세다. 노 관장은 “아동 성범죄는 범행의 정도도 심해지고 빈도도 잦아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라며 “전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1990년 임관한 그가 엄마로, 직업인으로서 줄다리기하며 살아온 지도 28년째다. “예전에는 업무도 과중하고 제도가 미비해서 일과 가정의 양립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당시 또래 여성 법관들끼리 ‘10년 후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요즘 젊은 법관들도 저랑 비슷한 고민을 하더라고요. 아직도 여전하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래도 더디지만 변하고 있고, 그 희망의 씨앗을 후배들이 계속 다지면서 절망하지 말고 계속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함께 ‘버티자’는 말 해주고 싶어요.”

노 관장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아직도 꿈을 꾼다”며 수줍게 웃었다. “남자와 여자, 지위 상하, 장애 유무를 다 떠나서 서로 존중받고 존중하면서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꿈꿔봅니다.”

▲노정희 법원도서관장은

젠더법연구회 신임 회장을 맡은 노정희 법원도서관장은 이화여대 법대 출신으로 1990년 판사로 임관했다. 1995년 12월 변호사로 개업했으나 2001년 인천지법 판사로 재임용됐다. 그 뒤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서울남부지법 부장판사 △서울가정법원 수석부장판사 등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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