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서 ‘판’이라는 말처럼 한 글자를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 것이다. ‘판’은 의존명사로서 ‘일이 벌어진 자리. 또는 그 장면’이라는 뜻이 있다. 노름판, 굿판 등이 이 판에 해당한다.
판은 판자(板子), 즉 널빤지의 뜻도 있다. 이 ‘板’으로부터 ‘반반한 표면을 사용하는 기구’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는데 장기판, 바둑판, 음반도 그런 예이다. CD가 나오기 전 LP음반은 ‘LP판’이라고 부르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판은 ‘그림이나 글씨 따위를 새겨 찍는 데 쓰는 나무나 쇠붙이의 조각’이라는 뜻도 있다. 나무에 새겨 인쇄를 했던 목판인쇄나 납 활자를 배열하여 인쇄하는 활판인쇄의 판이 바로 그런 예이다. 지리학 용어로 지구의 겉부분을 둘러싼 두께 100km 안팎의 암석판도 판이라고 한다. 이 판이 밀리면 지진이 발생한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의 ‘판’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리를 잡은 안정된 상태’라는 의미가 내재한다. 이러한 안정된 판을 고치자면 소란과 요동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현재 진행 중인 노름판이나 굿판을 엎어 새로운 판을 벌이려 하면 당연히 큰 소동이 날 것이고, 잘 두고 있던 장기판이나 바둑판을 뒤집어엎어도 난리가 날 것이다. 이미 조판된 인쇄 활판을 흐트려놓으면 일을 다시 해야 하는 난국을 맞게 되고, 지구의 판이 움직이면 세상을 무너뜨리는 지진이 발생한다.
따라서 어떤 판이든 판을 고치는 ‘개(改:고칠 개)판’은 소동과 무질서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판을 고치려 하는 사람과 고치지 않으려 하는 사람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개판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필요할 수도 있다. 문제는 개판 여부를 두고 서로 격렬하게 다투는 ‘개판 5분 전’에 있다. ‘개(改)판’은 ‘개(犬)의 판’이 아니라 사람의 판인 것이다. 개(改)판을 앞둔 6·13 지방선거, ‘개(改)판 5분 전’의 소동을 최소화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