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급등과 연초 폭락 사태로 불 붙었던 가상통화 규제 논의가 자취를 감췄다. 가상통화 대응 TF를 구성해 진화작전에 나섰던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등 관계당국은 1차 진화가 마무리된 후 적극적인 추가 행보를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가상통화 거래소 폐쇄 등의 강경 발언을 쏟아냈던 사법당국 역시 눈에 띄는 범법 사례에 대해서만 수사를 진행할 뿐이다.
아직 국내 가상통화거래소는 말만 ‘거래소’이지 사실 무면허 취급업소다. 진입규제는 물론 영업과 관련한 법적 규제가 백지상태다. 연초 폭락사태와 더불어 일부 가상통화거래소의 고의적인 부도 의혹, 유사수신 이용 사례 등이 터지면서 투자자들의 신뢰도는 바닥을 쳤다. 한국블록체인협회는 최근 거래소 간 자율 규제안을 발표하며 위기 상황을 개선하려 하고 있다. 당초 자율 규제안은 정부의 강한 규제를 방어하기 위한 성격으로 준비했지만 답보 상태에서 오히려 정부 규제보다 앞선 내용이 많이 담겼다. 무엇보다 제도권에 진입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직접 나서달라는 요청도 덧붙였다.
◇미·일 ‘인증된’ 가상통화 거래소 34곳… 국내는 ‘아직’ = 자본시장연구원이 3월에 낸 이슈보고서 ‘주요국의 가상통화 규제현황과 시사점’에 따르면 현재 일본과 미국에서 법률상 인허가를 받고 영업 중인 가상통화거래소는 총 34곳이다. 일본 16곳, 미국 뉴욕주 6곳이다. 유럽연합(EU)의 경우 아직 가상통화와 관련한 규제체계 없이 자금세탁방지지침에 기대고 있다. 독일은 은행법에 따라 가상통화 취급 업체들을 규율하고 있다.
법적 측면에서 현재 국내에서는 외국환거래규정상 소액해외송금업자의 가상통화 취급에 대해 언급하고 있을 뿐 이외엔 아무런 규정이 없다. 정부는 지난해 9월 금융위를 중심으로 가상통화 관계기관 합동 TF를 구성해 가상통화를 악용한 불법거래와 유사수신, 다단계 등 사기범죄에 대해 경고했을 뿐이다. 이후 은행의 가상계좌를 이용한 가상통화 매매를 중단하고 자금세탁 행위 관련 의심거래보고를 강화했지만 여전히 행정적인 재량 행위에 그치는 상황이다.
반면 미국의 경우 연방 차원과 주 차원에서 가상통화 관련 규제가 마련된 상태다. 특히 가상통화의 가장 큰 특징인 투자성과 지급결제성 두 가지 부분이 연방과 주 차원 규제에서 보완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연방 차원에서는 금융범죄단속반(FinCEN)과 선물거래위원회(CFTC), 증권거래위원회(SEC) 등 각 기관이 가상통화를 다루고 있다. FinCEN의 경우 가상통화중개기관을 미국판 자금세탁방지법(Bank Secrecy Act of 1970)상 자금서비스업자로 등록하도록 했다. 지침을 적용하기 위해 가상통화를 ‘특수한 통화의 한 형태’로 인정했다.
CFTC 역시 2015년 9월 유권해석을 통해 가상통화가 상품거래법상 상품의 정의에 포함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단순히 가상통화 상품을 기초로 한 파생거래가 아니라 가상통화 현물 거래에서 발생하는 사기나 시세조종에 대해서도 감독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SEC는 가상통화에 대한 직접 권한은 없지만 가상통화 관련 폰지사기사건을 투자계약으로 해석하고 과징금을 부과했다. 반면 국내 금융당국은 가상통화 관련 파생거래나 시세조종 사기 등이 발생해도 직접 규제·감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태다.
특히 지난해 7월에는 미국 통일법위원회 연례회의에서 통일가상통화업규제법을 채택해 가상통화와 관련한 주별 법을 일관되게 규정하려 하고 있다. 통일법은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가상통화와 관련한 논의가 더딘 주들이 이를 모델법으로 삼아 주법으로 편입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가상통화업자들이 여러 주에 면허를 신청해야 하는 부담이 줄면서 관련 시장이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미국 내에서는 뉴욕주 금융감독국(NYDFS)만 가상통화업자에 대해 면허를 받도록 한 규정(Bitlicense·비트라이선스)을 도입해 가상통화업자를 규제하고 있다. 비트라이선스는 무면허자의 가상통화업을 금지하고 중개기관의 거래장부 작성과 보관의무 등을 강제한다. 감독국의 감독·검사권도 보장해 위반 시 행정제재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의 경우 지난해 4월부터 본격적으로 ‘일본판 가상통화법’을 시행해 가상통화를 재산적 가치를 지닌 지급 결제수단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2014년 당시 세계 최대 가상통화 거래소였던 일본 마운틴곡스가 해킹으로 파산하는 충격적인 사태를 겪으며 자금결제법과 자금세탁방지법에 가상통화와 관련한 내용을 명시했다. 자금결제법에서는 가상통화 중개기관을 가상통화 교환업자라고 하며, 등록제를 통해 진입을 규제하고 있다.
◇국내 발의 법안들, 가상통화 지급결제 규율 놓쳐 = 자본시장연구원에서 이번 보고서를 작성한 천창민 연구위원과 배승욱 연구원은 미국과 일본, EU, 독일 등 선진국의 가상통화 규제가 지급 결제성에 기초해 설계돼 있다고 분석했다. 해외 주요국의 법규가 가상통화발행(ICO) 급증으로 가치가 급등한 지난해 5월 이전에 제정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에 가상통화의 투자성보다는 통화로서의 근본적 기능인 교환 수단성을 기초로 기존 통화와 관련한 규제를 본받은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입법 논의가 진행 중인 국내 상황은 정 반대다. 현재 가상통화와 관련해 발의된 세 개 법안이 모두 가상통화의 투자성 규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상통화 투자로 인한 피해와 사회적 논란이 입법의 배경이 됐기 때문이다.
실제 박용진 의원이 발의한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과 정태옥 의원의 ‘가상화폐업에 관한 특별법안’, 정병국 의원의 ‘암호통화 거래에 관한 법률안’을 보면 가상통화 규제의 가장 기본 쟁점인 지급 결제성 부분은 빠져 있다. 가상통화 중개기관의 정의와 관련해서도 투자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가상통화로 지급결제와 관련된 영업을 하는 경우 규제 방안이 분명하지 않다. 대신 해외 입법 사례에서는 빠져 있는 불공정거래 규제 등이 더 꼼꼼히 포함된 것이 특징이다. 정태옥 의원안에는 미성년자 등에 대해 금융위가 가상통화거래를 금지할 수 있도록 한 조항까지 포함됐다.
특히 천창민 연구위원·배승욱 연구원은 국내 관계당국은 물론 세 개 입법안 등 국내 가상통화 논의에서 ‘국제성’이 결여돼 있다고 지적한다. 가상통화는 증권과 달리 그 자체로 국제성을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현재 논의 중인 규제 수준은 국내 상황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가상통화 규제의 역외적용 등과 같은 쟁점에 대해서도 보다 활발한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에 7월 G20(주요 20개국) 재무장관 회의에서 논의될 가상통화 관련 글로벌 공동 규제안이 주목된다. 가상통화 취급업소에 대한 진입규제 문제와 별개로 가상통화와 관련한 과세는 연내 세법 개정안 반영을 목표로 검토 중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7월 회의 결과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8월 기획재정부의 세법 개정안에 포함돼 내년부터 실제 과세가 가능하다.
배 연구원은 “우리 현실에 맞는 가상통화 규제의 옷도 필요하지만 규제의 국제적 공조도 필수”라며 “G20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