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사에라’] 갑질 연쇄 반응

입력 2018-04-2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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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스튜디오/2014.08.07/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기호//스튜디오/2014.08.07/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선배, 잤어요? 아니요, 그냥 선배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요… 네, 혼자 한잔했어요. 집에서 마셨죠, 뭐. 제가 누구 만나서 술 마시고, 어디 그럴 처지인가요. 늘 집에만 있는데… 지금요? 다용도실이에요. 여기가 제일 편하거든요. 눈치도 안 보이고… 네, 세탁기랑 같이 있어요.

사실, 오늘 좀 울적한 일이 있었거든요. 제가 전에도 선배한테 와이프 흉 본 적 있잖아요? 혼자 돈 번다고 저한테 막 유세 부리고 갑질한다고요… 아니요. 사람이 어디 그렇게 쉽게 변하나요. 여전해요… 와이프가 얼마 전에 새로 이쪽 아파트 상가에 있는 학원으로 옮겼거든요. 그래서 더 바빠졌어요. 새벽 한 시도 좋고, 두 시도 좋고, 그때 집에 들어왔다가 잠만 자고 다시 다음 날 열한 시쯤 출근해요. 그러니까 사람이 더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지는 거 같더라구요… 네? 제가 그때 그런 말도 했었어요? 맞아요… 지금도 와이프 속옷이랑 스타킹이랑 따로따로 세탁기 돌리고, 그 앞에서 한잔하는 거예요. 스타킹 돌돌 말아서 벗어놓는 것도 똑같구요… 한데, 뭐 그런 건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내 딸이 그런 거다, 딸이 오죽 피곤했으면 그럴까, 그런 마음으로 하는 거죠. 그냥 내가 세탁기다, 지금 불림 기능으로 느리게,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빨래하는 세탁기가 빨래 탓하는 거 봤냐, 세탁기가 이웃집 세탁기 성능 부러워하는 거 봤냐, 탈수나 잘 하자 하는 심정으로…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은데… 사실 아직도 잘 적응되지 않는 건 와이프가 하는 말이에요… 잠잠하다가 꼭 한 번씩 폭발하는데… 그땐 진짜 와이프고 아들이고 다 나 몰라라 하고 그대로 산속에 들어가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요. 머리 기르고 양봉하면서 자연인처럼 살면 되지… 내가 왜 나이 오십 다 되어서 미역국 간 하나 제대로 못 맞춘다고 잔소리를 들어야 할까, 자동차보험 약정서를 장롱에 두었는지 책장에 두었는지 영수증함에 넣어놨는지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한다고 집구석에 앉아서 뭐 하는 거냐는 말을 들어야 할까… 와이프는요, 자기가 크게 말하다가, 자기 목소리에 더 화를 내는 사람이거든요. 그럴 땐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게 제일 나아요. 괜히 대꾸했다가는 정말 곧 숨넘어갈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거든요… 그런 것도 말하자면 갑질이잖아요? 부부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느냐, 사랑으로 정으로 사는 거지, 그런 말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뭘 잘 모르는 사람들 이야기죠. 아니면 그 사람이 지금 배우자에게 갑질을 하느라 그런 걸 못 느끼거나… 부부 사이에도 엄연히 누가 더 센지, 누가 더 가정 경제에 기여하는지, 그런 게 나뉘어 있잖아요.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갑질이 시작되는 거구요… 그걸 갑질이라고 말하기엔 좀 뭐 하니까 가장이 어떠니, 권위가 어떠니, 사랑이 어떠니 하면서 포장하는 거구요… 저도 직장 다닐 땐 몰랐는데… 이렇게 살림만 벌써 6년째 하다 보니까 그게 보이더라구요.

알아요, 선배… 저도 잘 알죠. 와이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라는 거… 지지난주에 와이프가 애들 모의고사 시험지를 집에 두고 가서, 그거 가져다주려고 학원까지 간 적이 있었거든요… 근데 거기에서 못 볼 꼴을 보고 말았어요… 와이프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학원 원장이랑 같이 서 있는 모습을 봤는데… 그 학원 원장은 와이프랑 비슷한 또래 여자거든요… 엘리베이터 앞이라서 중학생 학원생들도 많았는데… 그런 건 신경도 안 쓰고 학원 원장이 계속 제 와이프한테 비아냥거리더라구요. 학력이 안 되면 김 선생, 목소리라도 상냥하게 내셔야죠, 어디 김 선생 목소리 듣고 공부할 맛 나겠어요? 요새 애들한텐 실력보다 매력이라구요. 김 선생, 학력은 고칠 수가 없으니까 목소리라도 고쳐야죠, 안 그래요?

성질 같아선 네 목소리나 고쳐라, 와이프 대신 소리쳐주고 그 발로 돌아서고 싶었지만… 그게 또 안 되더라구요. 저도 회사 다닐 때 그런 일 많이 겪었고… 그런 일 참지 못해서 그만둔 건데… 와이프마저 학원 잘리면… 그게 안 되잖아요… 와이프는 학원 원장 갑질 견디고, 나는 와이프 갑질 견디고… 뭐 그렇게 서로 견디면서 사는 거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한두 명인가, 하면서…

한데요, 선배… 오늘 제가 이렇게 울적한 건 와이프 때문도 아니고, 와이프 학원 원장 때문도 아닌, 바로 저 때문이에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저 자신… 오늘 우리 아들이… 민철이 아시죠? 초등학교 4학년 제 아들. 민철이가 같이 저녁을 먹다가 불쑥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아빠, 아빠는 제 아빤데, 왜 저한테 갑질을 하세요? 저는 좀 어리둥절해졌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아들. 아빠가 언제 너한테 갑질을 해? 제가 그렇게 물으면서 황당한 표정을 지으니까, 아들이 그러더라구요. 제가 휴대폰 쓰는 거 언제는 되고, 언제는 안 되고, 아빠 기분 따라 달라지잖아요? 자기 기분 따라 행동하는 게 갑질이라고, 우리 선생님이 그러던데요? 민철이가 그렇게 말하는데…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겠더라구요. 제가 민철이한테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니요, 분명 그랬겠죠. 피곤하고 짜증나니까 저도 모르게 아이한테 분명 그랬을 거예요… 한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게, 그게 좀 슬퍼지더라구요. 갑질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가장 약한 아이한테서 멈춘다는 게… 우리 어른들은 그걸 잘 모르니까…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건데… 그게 누군가의 영혼을 다치게 한다는 게…

선배, 제 말 듣고 있어요? 아니에요, 우는 거… 선배, 제가 선배한테 이러는 건 갑질 아니죠? 이건 그냥 술 먹고 전화하는 거잖아요? 이런 것도 갑질인가요? 아니죠? 갑질 아니죠? 이게 갑질이면… 그냥 전화를 끊으면 되니까… 선배? 왜 말이 없어요? 자요? 지금 자는 거예요, 선배?

소설가·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월 1회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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