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안이 안갯속에 빠졌다. 첫 단계인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 중심의 분할합병에 대해 의결권 자문사들이 잇따라 ‘반대’ 의견을 내놓은 탓이다. 캐스팅 보터로 부상한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외부 ‘의결권전문위’에게 넘긴 것으로 알려진 만큼 그룹 입장에서 주총 ‘표 대결’을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17일 현대차그룹과 투자업계 등에 따르면 오는 29일 주총에서 맞붙게될 모비스와 엘리엇은 전날부터 각각 주요 주주를 대상으로 의결권 위임절차에 착수했다. 모비스는 다양한 채널을 동원해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설득에 나섰고, 엘리엇도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계 자산운용사에 의결권 위임 타진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리 계산해봐도..국민연금 반대하면 합병 무산 = 이번 합병 투표는 결국 국민연금의 방향에 따라 결정되는 구조를 가진다.
주주 확정 기준일인 지난달 12일 기준 현대모비스의 주주는 기아자동차 16.9%, 정몽구 회장 7.0%, 현대제철 5.7%, 현대글로비스 0.7%, 국민연금 9.8%, 외국인 48.6%, 기관·개인 8.7%, 자사주 2.7% 등이다.
이 중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를 제외한 현대차그룹 측의 우호지분은 30.2%다.
주주총회에서 현대모비스의 분할·합병안이 통과되려면 의결권 있는 지분의 3분의 1 이상이 참석해 3분의 2 이상이 안건에 찬성해야 한다. 최소 요건으로 지분 22.2%의 찬성을 얻으면 통과될 수 있다. 현대모비스의 우호지분만으로도 충족할 수 있는 요건이다.
다만, 이는 찬성의 최소 요건이다. 외국인 주주들이 대거 주총에 참석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참석률이 높아질수록 통과 기준도 함께 올라가기 때문이다. 산술적으로 외국인 주주가 전부 참석해 모두 반대표를 던지면 부결된다.
9.8%의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이 사실상 안건 통과를 결정지을 ‘캐스팅 보터’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여기에 더해 국민연금은 다른 국내 기관투자가들의 의사결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기관과 개인이 가진 8.7%가 사실상 국민연금이 가진 9.8%가 합쳐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하면 사실상 18.5%의 표가 다 반대표가 되버린다. 기업 정기주총 참석률이 통상 70∼80%인 점에 비춰볼 때 현대모비스 주주 중 75%가 참석한다고 가정하면 전체 주주 중 50.0%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호지분을 빼고도 20% 가까운 지분을 더 확보해야 한다. 이 구도하에서 국민연금이 반대하면 합병은 무산된다는 의미다.
◇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실낱 희망...의결권 자문기관 잇따라 분할합병 반대 = 앞서 글래스루이스와 ISS 등 글로벌 양대 의결권 자문사들은 잇따라 모비스 분할합병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세계 1위 의결권 자문사로 시장의 60%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진 ISS는 “거래 조건이 한국 법을 완전히 준수하고는 있지만, 그 거래는 현대모비스 주주들에게 불리해 보인다”며 주총에서 합병에 반대할 것을 주주들에게 권고했다.
글래스 루이스 역시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이 “의심스러운 경영논리”에 바탕을 뒀을 뿐 아니라 “가치평가가 불충분하게 이뤄졌다” 비판했다. 글래스루이스는 이번 분할합병이 대주주의 이익만을 위한 방안이라는 입장도 덧붙였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2015년 이후 엘리엇이 공격대상으로 삼은 대부분의 기업들에 대해 글래스루이스와 ISS가 엘리엇에 동조하는 의견을 낸 경우가 많다”며 “단기 투자자의 이익에 집중한 이들의 행보에 공통점이 많다”고 분석했다.
비슷한 상황은 국내에서도 이어졌다. 과거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기관이었던 서스틴베스트는 이번 분할모비스의 가치평가가 현재 모비스 주주에게 불리하게 산정됐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대신지배구조연구소는 분할합병 절차상의 문제를 들어 반대 권고안을 냈다. 모비스의 모둘 및 AS 사업부를 먼저 시장에 상장하고 가치를 판단받은 이후, 글로비스에 합병하는 게 모비스 주주에게 합리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최대 관심은 국민연금과 의결권 자문 계약을 맺은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의견이다. 기업지배구조원은 이르면 18일 의견을 국민연금에 전달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사 관계자는 “최종 판단은 국민연금의 몫”이라고 말했다.
◇ 국민연금, 외국자본 방패막이라더니..=이런 가운데 국민연금은 의결권 찬반을 외부 민간 전문가에게 맡길 것으로 보인다. 이날 금융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통해 입장을 정리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기금운용본부가 찬성 또는 반대하기 곤란한 안건은 의결권전문위에 결정을 요청할 수 있다.
상황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몰리면 엘리엇의 공세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엘리엇은 현대모비스를 축으로 한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재편에 제동을 건 뒤 현대차 경영권 간섭을 더 강화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외국계 투기자본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치권 역시 정부 차원의 기업 경영권 방어수단을 강화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부펀드로서 국민연금을 포함한 연기금이 우리 기업의 경영권 방어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들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윤상직 자유한국당 의원은 15일 상법개정안을 통해 특정 주식에 특별히 많은 수의 의결권을 부여해 일부 주주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차등의결권 제도’를 대표 발의했다. 이른바 ‘엘리엇 방지법’이다.
현대차그룹은 앞서 분할합병 반대입장을 낸 ISS 권고안과 관련해 “해외 자문사로서 순환출자 및 일감몰아주기 규제, 자본시장법 등 국내 법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의견을 제시했다”며 유감을 밝혔다. 그룹 측은 “대주주의 사회적 책임과 기업의 장기 장기 투자자 및 그룹의 미래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투자자들과 충분히 소통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