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상 칼럼] 경제불안과 환율주권

입력 2018-05-2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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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초빙교수, 전 고려대 총장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한 내역을 공개하기로 했다. 앞으로 1년 동안은 6개월마다, 그 이후는 3개월마다 외환당국이 달러를 사고판 순거래 금액을 발표한다. 정부는 지금까지 환율의 쏠림 현상이 나타날 때 점진적인 외환시장 개입을 통해 경제불안을 해소하는 정책을 폈다. 특히 정부는 외국 자본이 유입돼 원화 강세가 나타나면 수출 감소를 막기 위해 원화 약세를 유도하는 정책을 폈다. 또 외국 자본이 유출돼 원화가치가 떨어지고 금융시장이 불안하면 원화 강세를 유도하는 정책을 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외환시장 개입 내역은 세계 각국이 동의한 범위 내에서 개별 국가가 자율적으로 공개하는 것이 원칙이다. 특정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개입 내역을 공개하는 것은 환율주권의 침해로 볼 수 있다. 이번 외환시장 개입 내역 공개는 미국이 무역 적자 해소를 위해 한국에 가하는 통상 압박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최근 한국 경제의 실물과 금융부문이 불안하다. 실물부문에서 경제 성장을 이끄는 수출이 4월에 감소세로 돌아섰다. 자칫하면 올해 목표인 3% 경제 성장이 어려울 수 있다. 금융부문에서 신흥국의 통화가치가 급락하여 국제 금융위기의 전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외환시장 개입 내역의 공개가 경제 불안을 키울 가능성이 크다.

최근 미국은 대(對)한 무역 적자를 줄이기 위해 갖가지 보호무역 조치를 취하고 있다. 미국은 이미 한·미 FTA를 개정하고 세탁기, 태양열 패널, 유정용(油井用) 강관 등 한국 수출상품에 무차별적으로 보복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향후 미국이 외환시장 개입의 공개범위 확대와 공개 주기 단축을 요구할 경우 정부가 환율 조정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워 수출 산업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더욱이 환율주권의 침해가 금융위기를 재촉할 가능성이 있다. 최근 아르헨티나, 브라질, 터키 등의 신흥국이 재정 적자와 고물가 등으로 통화가치가 급락하고 국가 부도 위험이 커지면서 국제 금융위기의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다음 달 기준금리를 추가 인상하면 해외 투자자금이 빠져나가 신흥국들의 연쇄 부도 위험이 확산할 수 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라는 아르헨티나다. 지난달 기준금리를 무려 세 번이나 인상해 40%까지 올려도 페소화는 연일 곤두박질이다. 어쩔 수 없이 국제통화기금에 3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여타 신흥국들이 국가 부도 위기의 대열에 합류할 경우 국제금융시장은 혼돈 상황으로 치닫는다. 외국 자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30%가 넘는 한국 금융시장도 무사할 리 없다. 더구나 외국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금리인상 정책을 펼 경우 1500조 원에 달하는 가계부채의 부도 위험이 높아진다. 또 전체 기업 수의 15%에 육박하는 한계기업들이 위기상황을 맞는다.

외환시장 개입 내역의 공개는 경제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국제 신뢰를 구축한다는 차원에서 바람직하다. 현재 주요 20국(G20) 가운데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 나라는 중국과 한국 등 6개국뿐이다. 그러나 경제의 생존 차원에서 환율주권은 최대한 지켜야 한다. 1985년 미국은 대일 무역 적자가 쌓이자 강제로 플라자 협약을 맺어 엔화를 대폭 절상하는 정책을 폈다. 환율주권을 잃은 일본의 수출산업이 타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20년’을 겪었다.

이는 한국 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는 외국 자본의 투기 거래 등으로 환율이 급변동할 때 적극적으로 시장 안정화 조치를 취해야 한다. 결코 포기하면 안 된다. 경제의 구조개혁과 체질 강화를 한시바삐 서둘러 수출 및 금융강국의 위상을 다져야 한다. 외환시장 개입의 공개 내역은 경제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우리나라의 필요에 따라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수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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