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다음 목적지인 마르세이유로 이동하는 사이, 세계적인 연극축제가 열리던 프랑스 남부의 한 도시를 찾은 게 늦은 오후였다. 예정에 없던 방문이었으니 숙소도 없었다. 그냥 밤새 거리를 걷기로 했다. 다행히 꽤 늦은 시간까지 거리는 축제로 활기찼다. 다만 커다란 짐을 맡길 곳이 없다는 건 문제였다. 결국 밤새 양손 가득 무겁고 커다란 짐을 들고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위기는 긴장의 끝에 찾아왔다. 예정에 없었던 일정을 무사히 잘 보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다음 날 새벽 첫 기차를 기다렸다. 긴장이 풀렸던지 나도 모르게 슬며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다. 난 그렇게 갖고 있던 모든 짐을 도둑맞았다. 바지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폰을 제외하면 남은 것은 신용카드 한 장이 유일했다.
마음만 무거워질 뿐 바뀌는 건 없었다. 어설펐던 유럽 여행 경험만 믿고 자만했던 탓이다. 여행을 계속 이어가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던 중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모든 짐이 나의 곁을 떠나가니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양손 가득 무거운 짐 대신 몸이 가벼워지니 오히려 여행은 풍성해졌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예상 밖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임시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되돌아갔던 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도시였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채움의 여유를 좇는 일상을 살아가지만, 비움의 여유도 있음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