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해 9월 26일 열린 취임식에서 각오와 포부를 밝혔다. 법관의 독립, 사법 행정 개선, 수평적 의사소통 등을 앞세워 그가 그린 청사진은 ‘사법 개혁’이었다.
김 대법원장 취임 후 1년. 사법부는 어떻게 변했을까. 법관인사제도 개선, 일선 판사의 정책 결정 참여 확대, 대법원장 권한 일부 축소…. 사법 개혁의 밑거름으로 실행됐지만, 아직 어느 것 하나 뚜렷한 성과는 없다.
김 대법원장의 사법 개혁 추진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은 5월이다. 양승태 사법부 시절 판사 사찰에 대한 소문이 청와대와 법원행정처의 재판 거래 정황으로 번지더니 재판 기밀 문건 유출, 비자금 조성까지 헌정 사상 초유의 ‘사법 농단’ 의혹으로 커졌다. 6월 검찰 수사가 본격화한 후 양파 껍질처럼 드러나는 양승태 사법부의 각종 비위 의혹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급기야 김 대법원장이 사법농단 의혹 사태의 진앙인 ‘법원행정처 폐지’라는 강수를 뒀지만, 이번 사태를 정면으로 돌파할 만한 효과를 내지 못했다. 법원이 그동안 보여준 행동 때문에 박수 소리는 되레 묻혔다.
김 대법원장은 검찰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강조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 단계에서 법원이 보여준 태도는 실망감을 줬다. 협조는커녕 오히려 방해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생긴다.
법원은 검찰이 청구한 200건이 넘는 사법농단 의혹 사건과 관련된 압수수색 영장의 90%를 기각했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청구된 압수수색 영장 20만4291건 중 18만1040건이 발부(88.6%)됐다. 검찰이 신청한 압수수색 영장 10건 중 9건을 내줬다는 얘긴데, 사법농단 의혹 수사와 관련해서는 10건 중 1건만 발부했다.
영장기각 사유를 좀 더 들여다보면 언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법원은 “임의제출이 가능하니 굳이 압수수색을 할 필요가 없다”거나, “범죄 소명이 부족하다. 진술을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한 만큼 압수수색이 불필요하다”고 했다. 게다가 “대법원 자료를 외부 반출한 것은 부적절한 행위이나 형사책임까지 물을 만한 사안이 아니다”라고까지 했다. 압수수색 영장 전담 판사가 피의자의 혐의를 무죄로 단정한 것으로 비칠 수도 있는 만큼 매우 우려스럽다.
무엇보다 김 대법원장의 대처 방식이 아쉽다. 김 대법원장은 법원의 줄기찬 압수수색 영장 기각으로 여론이 악화하고 있음에도 침묵하고 있다. 법원이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하고 검찰이 재청구하는 사이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했던 고위 법관이 증거를 인멸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여전히 입을 닫고 있다. 김 대법원장이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에서 검찰 수사 협조를 재차 공언한 날에도 법원은 검찰의 사법농단 의혹 관련 압수수색 영장을 대거 기각했다.
김 대법원장의 임기는 이제 6분의 1이 지났다. 전임인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과오에 발목이 잡혀 시작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김 대법원장으로서는 모든 상황이 답답할 수 있다. 그러나 사법부의 수장이 진상 규명과 거리가 먼 현 상황의 방관자로 보여서는 곤란하다.
김 대법원장이 지난주 내놓은 사법개혁안이 제대로 효과를 내려면 곪은 상처를 덮지 말고 말끔히 도려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신뢰 회복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