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식의 시사 인문학] 인간 본성과 사회원리는 정복되지 않는다

입력 2018-10-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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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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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정복(征服)’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였다. 등산가가 세계적인 높은 산의 정상에 오르면 그 산을 ‘정복’했다고 보도했다. 고치기 어려운 병을 고쳤을 때도 그 병을 ‘정복’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학습 참고서의 명칭에까지 온통 ‘정복’이라는 수식어가 나붙었다.

‘정복’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남의 나라나 다른 민족 따위를 정벌하여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 뜻이 점차 확장된 데는 정복당하거나 그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져 온갖 설움을 감수해야 했던 역사적인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정복이라는 말에는 정복당한 대상이 정복자에게 꼼짝 못하고 전적으로 따른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인류는 뛰어난 지능 덕분에 자연과 환경을 정복해왔다. 지구의 긴 역사에서 보면 매우 짧은 기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이제는 지구의 정복자로 우뚝 섰다. 사실상 지구와 자연 환경은 인간 앞에 무릎을 꿇은 피정복자 신세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자연이나 지구 환경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자연의 다양한 법칙이나 원리 자체는 털끝만큼도 정복되지 않는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그런 법칙이나 이치를 인간이 활용할 뿐이다. 자연의 여러 특성이나 작용 원리를 파악한 다음 인간 스스로에게 유익하도록 유연하게 응용하는 데 불과하다.

물을 가열하여 증기로 변환함으로써 에너지를 얻고 그 에너지로 기관차를 달리게 한다. 이런 사례는 인간이 사물을 정복한 좋은 예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인간이 사물의 성질과 작용원리를 찾아내어 그에 착실히 따른 데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다양한 욕구와 바람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는 자연이나 환경, 세계와 우주를 향한 도덕적(!) 소망도 있는데 그 간곡함 역시 대단하다. 자연재해가 닥치더라도 선량한 사람이나 천진난만한 어린이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불치의 병, 몹쓸 병에 대해서도 비슷한 바람이 있다. 그런 병은 못된 짓만 골라가면서 한 인간이나 나라가 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자(老子)는 “천지는 아무런 정이 없어 만물을 추구(芻狗, 풀로 만든 강아지 장난감)로 여긴다[天地不仁 萬物爲芻狗]”고 말했다. 자연 현상의 원리에는 인간과 비슷한, 측은하다거나 미워하는 정서 같은 게 아예 없다는 말이다. 태풍, 해일, 지진 같은 현상으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할 때 어느 누구의 선량함이나 악독함, 어리다거나 늙음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과 비슷하다. 한마디로, 자연 현상이나 변화는 인간의 무슨 소망 같은 것에는 전연 무신경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곧잘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한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인간의 소원을 풀어준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랜 가뭄으로 논밭이 타들어갈 때 임금이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지극 정성으로 제사하면 기상학적으로 도저히 비가 내리지 않을 조건에서도 풍성한 비가 뿌려질까? 14세기 중엽 유럽에서 페스트가 창궐해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나갈 때 교회에 모여 간곡히 기도하면 병을 퇴치할 수 있다고 그 당시 사람들은 확신했다. 역사는, 많은 사람이 한데 모이다 보니 페스트균이 더욱 빠르게 확산되어 감염되어 죽지 않을 수도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고 증언한다.

“지성이면 감천”은 무슨 일에서든지 최선을 다할 때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강조하는 말쯤으로 새겨야 한다. 지극한 정성만 있으면 불가능은 없다고 정말 믿는다면 어처구니없는 주술적(呪術的) 사고에 빠진 것일 뿐이다.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1525~1569)의 ‘죽음의 승리’. 페스트와 같은 질병과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1525~1569)의 ‘죽음의 승리’. 페스트와 같은 질병과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자연은 물론이고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도 다양한 심리기제가 작용하고 각양각색의 집단에도 그 구성과 운영, 변동에 규칙성과 원리가 굳건하게 존재, 작동한다.

개인의 경우 그런 원리의 구체적인 예로서 ‘내 생명이나 내 자식의 생명은 남의 것보다 훨씬 중시한다’, ‘내 이익을 남의 이익보다 우선시한다’, ‘들이는 노력은 최소로 하되 성과는 최대가 되기를 바란다’ 등을 들 수 있겠다.

사회나 국가의 경우에도 그 사례를 열거해 볼 수 있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견제받지 않는 한, 부여된 권력, 권한을 최대한 휘두르려고 한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비용이 발생하며 누군가는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자유 시장에서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기업은 이윤 창출 가능성의 확실성과 크기에 따라 투자하고 고용한다’, ‘모든 나라는 자국의 존속과 번영을 다른 나라의 존속과 번영보다 앞세운다’ 등등.

세상에는 이상주의자들이 있다. 개인이든 사회든 간에 드높은 이상을 실현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는 확신에 찬 사람들이다. 이들이 볼 때, 현실의 인간은 동물적 욕구나 사소한 이익 추구에 매몰된 한심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인간은 원대한 목표, 가령 구성원 모두가 따뜻한 공동체적인 분위기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건설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고 보는 그들의 눈에 현실의 인간은 구제불능 그 자체이다. 당연히, 그들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간에 부정적인 행태를 방치하지 말고 마땅히 정복해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인 사회, 바람직한 사회를 말할 때 흔히 떠오르는 사회주의 표어들이 있다. ‘계급 없는 사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사회’ 같은 것이다. 모든 구성원이 각각 존엄한 존재로서 평등하게 대우받는, 인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런 사회다. 사회주의가 제대로 실현되면 바로 이런 사회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노력은 전면 실패했다는 게 역사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들이 이상적인 목표 달성의 의욕에 경도된 나머지 인간과 사회의 심리와 작동 기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의 해법은 현실적 적실성(適實性)을 원천적으로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연이나 환경 문제를 해결할 때는 물론이고, 개인적 문제의 해법이나 국가 정책을 마련할 때 인간과 사회의 변화 및 작동 원리에 역행해서는 안 된다. 그런 방안은 실제로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래 정복될 수 없는 성격의 법칙이나 원리를 마치 정복 가능한 대상인 것처럼 여길 때 무슨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최근 국가 정책이나 제도 개선 방안을 수립할 때, 그리고 각종 법령을 제정, 개정할 때 이런 점이 빈번히 간과되고 있다. 요즘 거의 모든 신문 지면을 채우다시피 하는 급격한 최저임금제 시행, 청년 취업과 일자리 마련 대책, 부동산 가격 안정화 시책, 기업의 공정거래 확립 방안 등은 졸속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 정교하지 못하다. 이런 엉성함은 한마디로, 사회나 국가 정치, 경제의 운영, 변화의 원리 자체를 마치 정복의 대상인 듯 여기는 그릇된 사고방식에서 빚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선한 동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올바로 해결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아야 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만으로는 안 된다. 합리적인 해법이나 전략이 반드시 구비돼야 한다. 보통 사람의 육체와 정신, 인간 사회에 드러나지는 않으면서도 실제로 작용하는 법칙, 원리에 부합하는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말이다.

좋은 동기와 강한 의지만 있으면 인간과 사회의 그 어떤 원리도 정복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맹신과 저돌성은 엄청난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당장 그런 정복자적 접근방식을 진지하게 반성하여 코페르니쿠스적인 관점 전환을 꾀해야 한다. 처음 잘못 꿴 단추들은 다시 제대로 채우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여러 문제점이 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당초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적폐(積弊)를 양산할 꼴이 되고 만다. 아무도 바라지 않을 두려운 후과(後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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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를 비롯 여러 대학과 기관에서 철학과 인문학을 강의해오고 있다. 저서 ‘웃기는 철학 우스운 철학’, 번역서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제레미 벤담 지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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