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번 유럽 순방에서 아쉬운 점도 많다. 문 대통령이 대북 제재 완화 필요성을 국제사회에 공론화하고 나섰지만, 동의를 얻는 데 실패했다. 무엇보다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의장 성명은 물론이고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주요국 정상들이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 입장을 재확인한 것은 향후 남북관계 개선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문 대통령이 그동안 북한의 비핵화와 남북관계 개선에 고군분투했지만, 청와대 실무진과 외교부의 외교 실패로 한동안 사라졌던 ‘CVID’라는 용어가 다시 국제사회에 등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안이한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19일 벨기에에서 현지 브리핑을 통해 “CVID는 완전한 비핵화에 포함된 용어이므로 용어 자체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 데서 잘 나타난다. 윤 수석뿐만 아니라 청와대 관계자들은 여러 차례 “CVID는 완전한 비핵화에 포함된 용어”라며 “미국과 북한도 ‘비핵화’라는 큰 틀에서 큰 이견이 없다”고 주장했었다. 왜 이 용어를 두고 정치권과 언론이 한미 간 또는 북미 간 이견이 있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느냐는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CVID란 말이 나온 배경과 평양 남북정상회담 전 북미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졌던 이유를 살펴보면 단순히 같은 개념으로 넘기기엔 문제가 많다.
CVID가 처음 공식적으로 나온 것은 2003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첫 번째 정상회담을 앞둔 백악관 브리핑에서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모든 정책과 업적을 부정했기 때문에 북핵 해결 문제에서도 새로운 전략으로 CVID를 꺼냈다. 종전 클린턴 정부가 사용했던 북핵 해결 원칙은 ‘포괄적 해결’이나 ‘일괄 타결’이었다. 이 말은 북한의 핵 폐기와 그에 따른 보상과 북한 체제 안전 보장이라는 상응 조치가 포함된 개념이었다.
하지만 CVID는 북한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이뤄야만 그에 따른 미국의 상응 조치를 하겠다는 개념이어서 먼저 북한의 비핵화를 이행해야 한다고 미국이 요구한 것이다. 얼핏 보면 같은 개념으로 보일 수 있지만, 큰 차이가 있다. ‘검증(Verifiable) 가능하며 불가역적(Irreversible)인’이라는 말은 실상은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미국이 검증됐다고 판단해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당시 부시 행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국의 극우 정치 세력 네오콘(Neocon)의 주도로 CVID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었다. 네오콘이 미국 군수산업업체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북핵 해결을 원치 않아서 CVID를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6·12 북미 정상회담 합의문에 보수주의자들의 강한 비난에도 CVID 대신 완전한 비핵화(CD·Complete Denuclearization)만 명시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한반도 비핵화 의지가 강한 트럼프 대통령은 CVID만을 주장해 북한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후 CVID라는 용어 대신 ‘FFVD(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라는 새로운 용어를 현재 사용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번 유럽순방에서 ‘CVID’ 용어가 공식적으로 다시 사용된 것은 청와대 실무진이나 외교부의 안이한 대처 때문이라고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분명히 CVID와 완전한 비핵화라는 용어에 뚜렷한 차이가 있음에도 포괄적으로 같은 개념이라고만 설명하며 대충 넘긴 실무진의 오판이 미국 정부조차 현재 사용하지 않는 ‘CVID’ 망령을 유럽에서 되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