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광고로 보는 경제] ‘국가부도의 날’ 1년 전…이 때만 해도 아무도 몰랐는데

입력 2018-11-2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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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없어진 세종모피라는 의류업체의 1996년 하반기의 모피 의류 광고.
▲현재는 없어진 세종모피라는 의류업체의 1996년 하반기의 모피 의류 광고.

1996년 하반기 어느 신문에 실린 모피 의류 광고.

늦가을 즈음, 어느 일간지에는 단 하루에만 전면광고, 하단광고를 포함해 총 5건의 모피 상품 광고가 실려 있었다. 반값 세일을 하고도 몇 백만 원을 넘나드는 밍크코트가 포함된 고급 의류 광고다.

이로부터 정확히 1년 후. 한국의 일간지에서 밍크코트 광고는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추어 간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들의 뇌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을 그 기억. IMF사태라고도 널리 알려진 ‘국가부도의 날’. 1997년 외환위기 때문이다.

▲세종모피의 광고에서 확대한 가격표. 여기 나온 밍크자켓, 밍크반코트, 밍크롱코트는 모두 20년 뒤인 2018년보다도 비싼 가격이다.
▲세종모피의 광고에서 확대한 가격표. 여기 나온 밍크자켓, 밍크반코트, 밍크롱코트는 모두 20년 뒤인 2018년보다도 비싼 가격이다.

◇세기말 겨울엔 모피가 대세였다지만…어떻게 20년 후보다 비싸게?

요즘은 겨울엔 롱패딩을 입는 게 대세다. 설현, 아이유, 박보검, BTS같은 당대 최고의 톱스타들은 추운 겨울이면 롱패딩을 입으며 트렌디함을 뽐낸다.

하지만 2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90년대 말은 ‘노스페이스’나 ‘패딩’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전이다. 이 시대에 두꺼운 ‘잠바’는 아저씨, 혹은 산악인들이 입는 옷이었다. 특히 여성의 경우 고급 숙녀복을 입어줘야 멋쟁이였는데, 그중에서도 또 모피코트 정도는 입어줘야 ‘캡’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세종모피라는 회사의 1996년 모피 광고다. ‘30% 대바겐’을 한 ‘밍크 명품 특선’을 보면 밍크 자켓이 364만 원, 밍크 반코트가 686만 원, 밍크 롱코트가 840만 원이다.

지금도 영업 중인 모피 의류 전문업체인 대동모피의 2018년 모피코트 시세를 보자. 대동모피의 홈페이지에서 밍크자켓은 99만~298만 원, 밍크반코트는 138~592만 원, 밍크롱코트는 273~592만 원에 판매하고 있다. 물론 대동모피의 가격도 60% 가까이 할인된 판매가를 기준으로 말한 것이다(원래 이런 사치재는 늘 파격세일가로 판매된다). 한 마디로 말하면 20년 후 물가보다 더 비싼 가격에 밍크코트를 판 것이다.

세종모피가 특별히 비쌌던 것은 아니냐고?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신문에 광고하고, 롯데백화점 특설매장에 입점한데다, 본사 직매장까지 운영했던 회사가 판매하던 상품이다. 다소 비쌌을지언정 팔리지 않을 터무니 없는 가격은 아니었을 거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1년 뒤의 대재난

일본의 1980년대 경제 버블이 꺼진 직후 일본 정부가 발간한 1993년 경제백서에서는 ‘버블 속에 있을 때는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고 모두가 이득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는 글귀가 있다. 물론 외환위기 직전의 한국 경제가 일본의 거품경제에 비견할 만큼 버블이 끼어있었다고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만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것은 분명했고, 1년 뒤에 다가온 대가는 참혹했다.

“20년 전 ‘밍크코트’가 지금보다 비싸지 말란 법 있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이 때의 물가가 어땠는지를 따져봤다. 1996년의 장바구니 물가를 다룬 일간지 기사들을 보면 이 당시는 8kg 쌀이 1만6000원, 배추 1포기 900원, 돼지고기 500g에 2000원 하던 때다. 후라이드 치킨 한 마리가 6000~7000원, 코카콜라 한 캔이 380원, 과자 죠리퐁과 자갈치는 300원이었다.

2018년 현재는 쌀 8kg에 4만 원대, 배추 1포기에 4000원대, 돼지고기 500g은 1만 원대, 후라이드 치킨은 2만 원대, 코카콜라 한 캔 1400원, 죠리퐁과 자갈치는 1500원이다. 간단히 따져봐도 지금보다 물가가 3분의 1에서 5분의 1 수준이었던 시절이다.

한 가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기사는 외환위기의 원인이 당시 ‘밍크코트’ 사 입는 국민들의 과소비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글이 절대 아니다. 다만 외환위기 이전에 우리 경제는 소비자들이 이렇게나 비싼 사치재(밍크코트가 사치재라는 것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확고한 사실이다)의 소비를 감당할 수 있었던 나라였고, 이 때만 해도 국민들은 앞으로 닥칠 파국적 재난에 대해 상상할 수 없었다는 점을 짚고 싶은 것이다.

열심히 찾아봤지만 2000년대 이후 세종모피라는 회사의 광고는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 외환위기의 파도를 넘기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95년 출시된 순금으로 만든 역대 월드컵 포스터 미니어처(위)와 1994년에 호주 조폐국에서 발행한 캥거루 금화. 외환위기 이후 이러한 형태의 금 기념품은 대부분 광고상에서 사라져 버린다.
▲1995년 출시된 순금으로 만든 역대 월드컵 포스터 미니어처(위)와 1994년에 호주 조폐국에서 발행한 캥거루 금화. 외환위기 이후 이러한 형태의 금 기념품은 대부분 광고상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 많던 금 광고는 어디로 갔을까?

1997년을 기점으로 광고가 게눈 감추듯이 사라져 버리는 또 하나의 상품이 있는데, 바로 금이다.

사진 상단의 광고는 2002 월드컵을 앞두고 1995년에 순금으로 제작해 판매한 역대 월드컵 포스터의 미니어처다. 순금 460g으로 만든 미니어처 세트를 1485만 원에 판매하고 있다. 23일 기준 금 460g은 2048만9421원이다. 다만 그냥 순금과 순금을 가공한 미니어처를 동일하게 비교하는 데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비교가 더 쉽도록 현재도 판매하는 금 상품과 비교해보자. 아래는 호주에서 판매하는 캥거루금화의 1994년 광고다. 캥거루금화는 지금도 호주 조폐국에서 해마다 발행하고 있다. 2018년 호주 캥거루금화의 1/10온스(3.11g) 가격은 19만5000원. 현재 순금 3.11g이 약 13만8500원이다. 금값의 약 40% 정도가 캥거루금화의 세공비로 들어간 셈이다.

1994년 당시 캥거루금화의 판매가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이 해의 금 시세는 3.75g(1돈)당 대략 4만5000원. 1g당 1만2000원이니 순금 1/10온스(3.11g)은 3만7320원이다. 세공비가 금값의 현재와 같이 40%라고 가정하면 캥거루금화는 약 5만2000원 정도 했을 것이다. 다른 재화들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4분의 1 수준이다. 이때는 금값이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저렴해서, 기념품으로도 많이 소장했고, 선물도 더 많이 했었다.

외환위기 이후 몇 년간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금 광고는 신문에서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다. 외환위기 직후 금으로 만든 기념품을 소비자에게 판매하겠다는 발상은 당대 시류와 대단히 맞지 않았다.

사진 속 광고의 캥거루금화와 월드컵 포스터 순금 미니어처들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선 대략 짐작이 간다. 아마, 녹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곳에 쓰였을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은 자진해서 조국을 위해 가지고 있던 금을 내놓았다. (연합뉴스)
▲1997년 외환위기를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은 자진해서 조국을 위해 가지고 있던 금을 내놓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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