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창작의 장르나 형식은 다양하고, 교감하고 즐기는 방식 또한 다양하다. 크게 나누면 공간예술(미술)과 시간예술(음악)이 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음악이나 연극은 공연이 끝나면 내용(아름다움)은 소멸한다. 시간을 저장하거나 되돌릴 수 없듯 현장에서 감상하고 즐길 수는 있되 소유할 수는 없다. 반면 공간구성을 통해 형상화되는 미술은 소유가 가능하고 소유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독점할 수 있다. 미술활동에서 창작과 더불어 컬렉션이라는 또 하나의 중심축이 존재하게 되는 이유다.
창작이 감성의 영역이듯 컬렉션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그 동인(動因)은 창작보다 더 감성적일 때가 많다. 때로는 충동적으로 치달아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심미안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자신을 유혹하는 명품(名品)이나 명화(名畵) 앞에 서면 이성은 물론이고 감성조차 마비되어 전율하는 것이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한, 아니 그 유혹을 운명처럼 사랑한 화가 렘브란트는 그림을 사 모으느라 전 재산을 탕진한 나머지 극심한 궁핍 속에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화가로서 누구보다 아름다움의 본질을 잘 알았을 그였기에 그것을 소유하고픈 욕망 또한 누구보다 강했던 것일까?
미술품 컬렉션의 세계에서는 그처럼 소유 욕망에 불을 지르는 마력(魔力) 같은 추동력이 존재한다. 그 추동력에는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지름신(神)에다 열정, 탐닉, 갈증이 한데 뒤엉켜 있다. 그런 까닭에 미술품 수집은 늘 상식을 벗어나는 위험을 안고 간다.
그런 행태적인 속성은 때로는 위험으로 때로는 행운으로 작용하면서 컬렉터들을 욕망의 늪으로 끌어들인다.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여인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눈빛처럼, 유혹은 은근하면서도 끈질기고 세속적이면서도 초월적이다. 그 눈빛에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는 컬렉션 속언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미치기 위해서 미쳐야 하는 컬렉션의 세계에서는 소장하려는 욕망이 병적일 정도로 심해지면 비도덕적인 지경에까지 가는 것도 다반사다. 책을 수집하는 장서인이 사랑하는 여첩과 진서(珍書)를 교환했다는 중국 옛이야기에서 보듯, 소유와 수집을 향한 욕망은 그것을 이성적으로 절제하기보다는 혼탁하고 천박한 마음을 조장하여 인간을 타락시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컬렉션은 분명 비극적이다.
컬렉션의 현장에서는 그러한 유혹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하고 소유 욕망에 눈이 멀어 도난품과 같은 부정한 물건에 손을 대고, 심지어 직접 도적질을 하는 사례도 많다. 소유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이 욕심이 되고 강박증이 되어 버리면, 소유하느냐 못하느냐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는 미술품 절도범의 귀재(?)로 회자되는 브라이트비저(S. Breitwieser)의 행태에서 비극적인 소유 욕망의 단초를 발견한다. 브라이트비저는 1990년대 중반에 유럽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172곳의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239점의 작품을 훔친 죄로 재판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절도행각이 돈 때문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미술품을 소유하고픈 간절함과 통제할 수 없는 욕망 때문이었다고 진술했다.
나는 컬렉터들의 욕망을 이해하고 그들의 심리를 긍정한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영혼을 홀린 아름다움을 탐하기 위해 삶을 송두리째 던지는 사람들이다. 차가우면서 뜨겁고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이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컬렉션 욕망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들에겐 그 욕망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자양분의 차원을 넘어 삶 자체였고, 아름다움은 그들을 해원(解寃)하고 그들의 영혼을 자유케 하는 영매(靈媒)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