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상업(商業)’의 ‘상(商)’이라는 한자는 ‘설문(說文)’에 “상, 종외지내야(商, 從外知內也)”라 하여 “바깥으로부터 안을 알다”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헤아리다’, ‘계산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상(商)’은 동시에 “서로 의논하다”, “상의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미들이 결합하여 ‘상업’이라는 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중국인 공동체 일궈온 상(商)의 전통
이후 ‘상(商)’이라는 용어는 “두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계획하고 토론한다”는 의미로 발전되었으며, 중국인들은 이러한 공동체의 사회 문화에 기초하여 자연스럽게 타협과 조화를 전통으로 삼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은 역사적으로 이러한 상업공동체의 전통을 통해 함께 힘을 모아 전진해 나가는 상업국가로서의 힘을 저력 있게 과시해왔다.
고대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많은 상점들은 가게 앞에 ‘도주사업(陶朱事業)’이나 ‘단목생애(端木生涯)’라는 족자를 내걸었다. 여기에서 ‘도주(陶朱)’란 춘추시대 오나라의 명신(名臣)이자 탁월한 상인이기도 했던 범여를 가리키며, ‘단목(端木)’이란 공자의 제자였던 자공을 지칭한다. 중국 상인들은 범여와 자공을 존숭하면서 일종의 신앙처럼 숭배하였고, 특히 자공은 ‘재신(財神)’으로 모셨다.
자공(子貢, 子공으로도 쓰인다)의 이름은 단목사(端木賜)이고, 자공은 자(字)이다. 기원전 520년 춘추시대 말엽 위나라의 상인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공자의 제자로서 중국 유상(儒商)의 비조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운명에 순응하기보다 재산을 모으다
논어 ‘선진(先進)’에서 공자는 제자 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났던 안회(顔回)와 자공을 비교하여 “안회는 도덕적으로 거의 완전하지만 항상 가난하였다. 그러나 자공은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산을 모았으며, 예측을 하면 항상 적중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공자의 유가사상은 의(義)를 중시하고 이(利)를 가벼이 여긴다. 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는 “만약 부가 도에 부합하다면 그것을 추구할 수 있다. 설사 나를 말몰이꾼을 시켜도 할 것이다. 그러나 부(富)가 도(道)와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추구할 수 없다.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겠다”라고 천명하였다. “부귀란 하늘의 뜻”이므로 그는 반복하여 “이(利)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 사상을 펼쳤다.
하지만 자공은 공자의 이러한 숙명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물건을 비축하여 조(曹)나라와 노(魯)나라 일대에서 비싼 물건을 팔고 싼 물건을 사들이는 방법으로 상업을 경영함으로써 공자의 수많은 제자 중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값이 쌀 때 사들이고 비쌀 때 판다’는 말은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폐거(廢擧)’로 표현되고 있다. ‘중니제자열전’은 계속하여 자공이 시장 상황의 변화에 맞춰 물건 값이 쌀 때 사들이고 비쌀 때 파는 방법으로 이익을 얻어 거부가 되었음을 자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재물을 사랑하지만 도를 잊지 말아야
언젠가 공자 일행이 진(陳)과 채(蔡) 두 나라로부터 포위되어 식량이 끊어지고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공자 일행은 먹을 것도 없고 기력이 완전히 떨어져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자공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초나라 왕을 설득하여 초나라가 군대를 출동시켜 공자를 영접하자 비로소 공자 일행은 곤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본래 자공이 처음 공자를 만났을 때만 해도 자신이 오히려 공자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논형(論衡) ‘강서(講瑞)’는 “자공이 처음 공자를 스승으로 모신 그 해에 스스로 공자보다 낫다고 여겼다. 2년째에 스스로 공자와 같다고 여겼다. 그러나 3년이 되자 공자에 미치지 못함을 알았다. 처음 한두 해 동안에는 공자가 성인임을 알지 못했으나 3년 뒤에는 성인임을 알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자공은 공자의 학식이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높다고 말했으며 공자를 성인이라 칭하였다.
당시 자공의 명성은 대단히 높은 것이어서 그가 오히려 공자보다 현명하다는 세간의 평가가 적지 않았다. 노나라 대부인 손무(孫武)는 조정에서 공개적으로 자공이 공자보다 현명하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자공은 “비유하여 말하자면, 내 학문 수준은 낮은 담장으로 둘러친 집이어서 누구든 볼 수 있지만, 공자 스승님의 학문 수준은 몇 길이 넘는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친 종묘와 같아서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간다고 해도 볼 수가 없다. 더구나 능히 그 문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도 극히 적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확하지 않은 말을 하게 된다”고 대답하였다.
자공이 이처럼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나라의 다른 대신 진자금(陳子禽)은 자공에게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겸손해서 한 말이오. 공자가 당신보다 무엇이 더 현명하다는 것이오?”라고 반문하였다.
하지만 자공은 스승 공자의 성인됨을 깊이 깨닫고 그의 사상을 세상에 널리 보급하는 일을 자신의 평생 임무로 삼았다. 그는 자신이 얻은 정치적 명예와 부(富)를 토대로 삼아 스승 공자의 사상을 널리 천하에 전파한 것이었다. 그리고 공자는 자공의 이러한 경제적ㆍ정치적 지원을 통하여 마침내 세상에 그의 뜻을 펼칠 수 있었다.
공자는 이(利)를 가벼이 여기고 상인을 결코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을 천하에 떨칠 수 있도록 만든 사람은 바로 그 부유함이 제후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단목사, 자공이었다.
부자가 명성과 지위를 함께 얻으려면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 편에서 자공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하고 있다.
“자공은 공자로부터 학문을 익힌 후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그는 물건을 비축하여 조나라와 노나라 일대에서 비싼 물건을 팔고 싼 물건을 사들이는 방법으로 상업을 하여 공자의 우수한 70제자 중에서 그가 가장 부유하다고 할 수 있었다. 원헌(原憲)은 술지게미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궁벽한 동네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자공은 수레와 말이 무리를 이루었고 비단 예물을 가지고 각국을 방문하여 제후들의 연회를 받았다. 제후들은 그를 맞아 군신의 예가 아니라 평등한 예로써 대하였다. 공자의 이름이 능히 천하에 떨칠 수 있었던 데에는 자공의 도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야말로 부자가 세력을 얻으면 명성과 지위가 더욱 빛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자는 자공을 아껴 그를 가리켜 ‘호련지기(瑚璉之器)’라 평가했는데, ‘호련지기’란 ‘재능이 매우 뛰어나 큰 임무를 담당할 만한 인물’이라는 의미이다. 훗날 당 현종은 자공을 ‘여후(黎侯)’에 봉했으며, 송나라 도종은 ‘여공(黎公)’으로 한 단계 올렸다. 그리고 명나라 가정제(嘉靖帝) 때에 이르러 ‘선현단목자(先賢端木子)’로 봉해졌다.
군자애재 취지유도(君子愛財 取之有道). 군자는 재물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취하는 데에 도(道)가 있다는 뜻이다. 바로 자공이 남긴 유상(儒商)의 기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