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국민 여러분께 이렇게 큰 심려 끼쳐 드린 데 대해 진심으로 송구한 마음이다”라고 밝혔다.
서울중앙지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11일 오전 9시 30분 양 전 대법원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해 조사한다. 이날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출석에 앞서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앞서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포토라인이 아닌 대법원에서 입장을 밝히겠다고 예고했다. 대법원 내부에서 입장발표가 무산되자 양 전 대법원장 측은 대법원 정문에서 기자회견을 강행했다.
오전 9시 차에서 내린 양 전 대법원장은 포토라인에 선 뒤 대법원 내부에서 ‘양승태를 구속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는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 본부 노조원들을 잠시 둘러봤다. 이후 정면을 바라본 양 전 대법원장은 “이 일로 인해서 법관들이 많은 상처를 받고 또 여러 사람들이 수사당국으로부터 조사까지 받은 데 대해 참으로 참담한 맘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이 모든 것이 저의 부덕의 소치로 인한 것이고 따라서 그 모든 책임은 제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다만 이 자리를 빌어 제가 국민 여러분에게 우리 법관을 믿어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고 싶다”며 “절대다수의 법관들은 국민 여러분에게 헌신하는 마음으로 법관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성실히 봉직하고 있음을 굽어 살펴주시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 사건과 관련된 여러 법관들도 각자의 직분을 수행하면서 법률과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고 있고, 저는 이를 믿는다”며 “그분들의 잘못이 나중에라도 밝혀진다면 그 역시 제 책임이므로 제가 안고 가겠다”고 강조했다.
이날 검찰 조사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실관계는 오늘 조사 과정에서 기억나는 대로 가감 없이 답변하고, 오해가 있는 부분은 충분히 설명하도록 하겠다”며 “모쪼록 편견이나 선입감이 없는 공정한 시각에서 이 사건이 조명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입장발표가 끝난 뒤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 기자회견 부적절하다는 지적 있는데 굳이 여기서 한 이유에 대한 질문에 “기자회견을 한다기보다는 제 마음은 대법원에, 전 인생을 법원에서 근무한 사람으로서 수사하는 과정에서 (법원에) 한 번 들렀다가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답했다.
대법원 입장발표가 후배 법관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는 “편견이나 선입견 없는 시선에서 이 사건을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자택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재판개입, 인사개입 없다고 했던 발언에 대해서는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라고 선을 그었다.
검찰 수사과정에서 관련 자료들이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누차 이야기했듯이 그런 선입감을 갖지 말라. 출석 시간이 다가와서 부득이하게 이만 그치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이날 대법원 정문 주변에는 전국공무원노조 법원 본부 등이 양 전 대법원장의 기자회견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법원 노조는 “마지막 애정이 남아있다면,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다면 기자회견을 하지 말고 검찰 포토라인에 서라”며 “여기는 더 이상 당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대법원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양 전 대법원장은 덤덤히 3분간 입장을 발표한 뒤 기자의 질문에 모두 대답하는 여유를 보였다. 9시 5분께 기자회견을 마무리하고 차에 올라탄 양 전 대법원장은 서울중앙지검 서문을 통해 9시 7분 검찰 포토라인을 지나쳤다. 검찰 포토라인에서는 멈춰 서서 사진을 찍거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바로 조사실로 향했다. 수사팀은 예정대로 9시 30분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한편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을 통해 사법농단 의혹 전반을 확인할 방침이다. 검찰은 양승태 사법부가 청와대 의사에 따라 일제 강제징용 소송 등 재판 지연을 위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외에도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옛 통합진보당 지방의원 지위확인 소송, 사법부가 재판에 개입하는 데 관여한 혐의를 받는다. 사법부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법관을 사찰하고, 불이익 인사 관련 ‘판사 블랙리스트’ 문건을 작성하는 등의 의혹에도 연루됐다. 검찰은 이날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양 전 대법원장을 불러 사실관계를 확인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