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듯하지만 그 차이는 크다. 어감도, 질문 대상도, 답도 다르다. 전자엔 나의 계급장, 완장을 알아서 모셔 달라는 거만이 담겨 있다. 후자는 완장, 계급장을 다 뗀 민낯에 대한 겸허함이 자리한다. 전자는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질문이다. ‘내가 누군지 알아’ 하며 목에 힘을 줄수록, 정작 ‘나는 누구인가’ 실체에선 멀어진다. ‘내가 누군지 알아’는 겉으론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약하다. 인정 갈구는 기본적으로 남에게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에게 존재감을 뿜어내기 위해 진짜 자신의 존재를 잃어야 하는 역설이다.
최상위층 0.1%의 교육열을 그린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 전교 1등, 학력고사 전국 수석을 쉰 넘어서까지 늘 이마에 달고 다니는 명문대 의대 교수 강준상(정준호 분)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며 오열하는 장면이다. 강 교수는 자신의 출세욕 때문에 혼외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했음을 뒤늦게 알고 흐느낀다.
“여태 병원장, 그 목표 하나만으로 살아왔는데, 그거 좇다가 내 딸 내 손으로 죽인 놈이 돼 버렸잖아, 그게 뭐라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나 강준상이 없잖아. 허깨비가 된 것 같다고, 분칠 때문에 본래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오십 평생을 잘못 살아왔잖아. 위만 보지 말고, 옆도 뒤도 돌아보았더라면 지금보다는 철든 삶을 살았을 텐데….”
강준상이 평생 공들였던 스카이 캐슬은 말그대로 천상의 성이 아니라 ‘허상의 성’이었던 셈이다. 그의 자책을 보며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연상됐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성공으로 생각하며 살았는데 사실은 실패한 삶이고, 명예는 멍에였다는 자성에서 서로 통한다.
야심만만한 판사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앞두고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때 죽음에 대한 공포, 병의 고통보다 그를 더 괴롭힌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평가였다. ‘내 삶 전체가 정말로 잘못된 것일지 모르며, 어쩌면 이제껏 잘 못 살아온 것일 수 있다’는 자각이었다. 그는 “산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다.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산을 오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딱 그만큼씩 진짜 삶이 내 발 아래로 멀어져 가고 있었어”라고 돌아본다. ‘내가 누군지 알아’로 떵떵거리기 위해 살아왔지만, ‘진짜 나는 돌아보지 않고’ 살아왔다는 헛헛함이었다.
하긴 강준상과 이반 일리치뿐이겠는가. ‘내가 누군지 알아’ 한마디가 세상에 전방위로 전천후로 먹히는 삶을 위해 치달린다. ‘무엇이 되기 위해’ 질주하느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놓친다. 많은 사람이 남을 의식하느라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남의 우러름과 부러움을 받는데 목매느라 정작 자신의 목을 조인다.
‘내가 누군지 알아’의 남부러운 삶과 ‘나는 누구인가’의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똑부러지게 구분한 사람이 공자다. 이를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대비해 말한다. 자신을 위한다는 위기(爲己)는 이기(利己)와 구분된다. 이기가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것이라면 위기는 진정한 자아를 아는 것이다. 위인(爲人) 역시 이타(利他)와 다르다. 이타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면 위인은 남의 인정을 갈구해 급급한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지만, 오늘날은 남에게 잘난 척하기 위해 배운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논어 헌문편]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 위인지학의 질문이라면 “나는 누구인가”는 위기지학의 질문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한 공부를 하지 말고 스스로를 위한 공부를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공부는 삶으로 바꿔 말해도 무방하다. 공부든, 인생이든 다른 사람의 시선에 얽매여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의 인정에 급급하다 보면 결국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는 죽비소리다. 장자는 공자보다 한술 더 떠 착한 일을 하더라도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라고까지 말한다. 처음 의도와 상관없이 명예와 인정의 욕망이 사람을 포장과 분장의 나락에 떨어지게 하는 위인지학의 결과를 낳는다는 우려 때문이다.
설 명절이 며칠 남지 않았다. 이번 명절엔 ‘나는 누구인가’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자. 남 위하느라, 나를 위하지 못해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나를 찾아오자. ‘누를 것인가, 눌릴 것인가’ 강박감에서 벗어나 ‘누리는’ 삶을 꿈꿔보자. 남의 인정 바라기를 넘어 나의 진정, 나다움에 대해 돌아보자. 완장, 계급장 다 떼고, 포장, 분장 다 벗긴 정갈한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