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봄을 노래하는 시를 읽다

입력 2019-02-2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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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인문학 저술가

이즈막은 봄의 기대로 설렌다. 겨울이 물러난 뒤 햇볕은 다사로워진다. 기온이 오르면서 나뭇가지마다 잎눈이 돋고, 꽃망울이 맺힌다. 하지만 봄은 쉬이 오지 않고 어딘가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며 지체한다. 이맘때면 꼭 한두 차례 봄꽃을 시샘하는 추위가 닥친다. 이 때늦은 한파를 꽃샘추위라거나 ‘영등할매 추위’라고 한다. 영등할매는 음력 2월 초부터 보름 동안 지상에 머물며 비바람을 관장하는 가신(家神)이다. 영남 지방에서는 영등할매에게 한 해 농사의 풍년을 빌고 식구들의 안녕을 기원한다. 아무튼 영등할매가 심술부리듯 데려오는 늦추위에 김칫독이 터지고, 중늙은이가 얼어 죽는다는 옛말도 있다.

박용래 시인의 시 중 ‘영등할매’라는 시가 있다. “김칫독 터진다는/말씀/이월(二月)에/떠올라라/묵은 미나리꽝/푸르름 돋아/어디선가/종다리/우질듯 하더니/영등할매 늦추위/옹배기 물/포개 얼리니/번지르르 춘신(春信)/올동 말동.”(박용래, ‘영등할매’) 사람들은 겨울이 끝났다고 서둘러 봄옷을 꺼내고 겨울옷들은 옷장에 간수했다가 낭패를 본다. 추위가 다 갔나 했는데, 영등할매 늦추위에 옹배기 물이 어는 것이다. 밤마다 호르르호르르 울던 산개구리가 이 늦추위에 혼비백산하고, 김칫독이 터지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꽃샘추위에도 불구하고 봄은 기어코 오고야 만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화창한 날씨가 이어진다. 서양의 중세 의학에서는 햇빛이 인간의 세포 조직을 키우며 장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건강하건 병약하건 햇볕을 자주 쬐는 것이 몸의 원기를 북돋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봄비가 메마른 땅을 적시고, 비는 땅속 둥근 알뿌리와 씨앗을 뒤흔들어 깨워 싹을 움트게 한다. 나무는 저 땅속에서 수액을 줄기와 잎으로 퍼 올리며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을 채비를 한다. 양기는 만물의 생령(生靈)을 일깨우고 무릇 생명 가진 것들을 약동하게 한다. 잿빛 대지가 차츰 연두색으로 바뀔 무렵 조류와 양서류들은 산란을 하고, 동물들은 새끼를 배태한다.

봄은 곧 절정으로 치닫는다. 섣달그믐의 추위와 어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사방에는 봄빛들이 터지며 눈부시게 범람한다. 봄 세상이 한결 밝아진 것은 태양 빛이 강해진 데다 온갖 꽃들이 제 안의 빛을 바깥으로 밀어내며 찬연하게 피어나는 까닭이다. 한껏 높아진 광도(光度) 속에서 겨울잠에서 깬 개구리와 뱀들이 튀어나오고 꽃들은 산자락과 들머리에 흐드러진다. 봄엔 만물이 생기를 얻고 반짝인다. 젊은 가슴에는 춘정(春情)이 발동한다. 처녀 얼굴엔 홍조가 돌고 웃을 땐 흰 이가 어여쁘다. 총각은 기운이 뻗쳐 공연히 힘자랑을 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봄빛 포근하게 내리는 누리에서 겨울 외투를 벗고 겨우내 움츠렸던 가슴을 활짝 편 채 새봄의 기쁨을 뼛속까지 누려야 한다.

젊은이들이 봄에 짝을 구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짝 없이 혼자 봄을 맞고 떠나보내는 청춘은 설움과 시름에 빠진다. 김소월은 ‘봄비’에서 그런 서글픈 심사를 이렇게 노래한다.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서럽다, 이 나의 가슴 속에는!/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오지만/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김소월, ‘봄비’) 가장 찬란한 봄은 비 뒤에 온다. 봄비로 인해 이끼와 잔디는 파릇해지고, 겨우내 죽은 듯 보였던 나무들은 검은 나뭇가지마다 온통 초록의 윤기로 반짝이는 잎사귀를 토하고 꽃봉오리들을 활짝 피워낸다. 그러나 천지를 화사하게 하던 꽃들은 봄비에 덧없이 지고 만다. 꽃들이 지고 왔던 봄이 갈 때 가는 봄을 붙잡을 수 없기에 설움 많은 시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운다고 했다.

나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 들길과 논밭이 있고, 살구나무와 마을 한가운데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었지만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다.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와/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과/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제비가 날 듯 길을/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그렇게//천연히//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오래오래 잔광이 부신 마을이 있다/밤이 더 많은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박용래, ‘울타리 밖’) 나는 그런 마을에서 태어나고 소년으로 자라났다. 날이 풀리면 이상하게도 몸이 근질근질했다. 온몸에 생동하는 봄의 기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봄이면 나는 공연히 들길 끝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해마다 키가 반 뼘쯤이나 커졌다. 자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들길을 아련하게 응시하며 먼 나라를 상상하는 일에 빠졌지만 그보다 더 자주 들로 산으로 뛰어다녔다. 뻐꾹새가 우는 산에서 꽃가지를 꺾고, 혼자 놀다가 심심하면 흙을 파먹고, 수풀 속에 숨은 새둥지에서 새알을 훔쳤다. 밤이 되면 종일 뛰어다니느라고 기운이 소진해서 혼곤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온통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뒤덮인 서울로 올라와서는 봄을 아예 잊었다. 오동꽃이 피고 지는 것도, 왔던 봄이 덧없이 사라지는 것도 모른 채 그저 아수라와 같은 세상에서 아등바등 사는 일에 매달려서 계절 감각 따위는 잊고 살았다. 다시 봄을 찾은 건 마흔 줄에 서울을 떠나 시골에 집 짓고 내려온 뒤였다. 응달에 쌓인 잔설이 녹고, 하천으로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갈 때 봄은 선연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저수지 주변에 무리지어 서 있는 버드나무 군락이 연둣빛을 띄고, 양지쪽에는 복수초들이 노란 꽃을 피워낼 때 눈물이 솟았다. 겨우내 먹은 묵은지 짠맛에 혀가 진저리를 치면 둔덕에서 캔 달래나 원추리 같은 걸 뜨거운 물에 데친 뒤 된장에 묻혀 먹었다. 그러면 봄의 입맛이 새파랗게 살아났다.

봄은 인생을 찬란하게 만든다. 그러니 자잘한 근심이나 걱정 따위는 개나 물어가라고 하라! 봄이 오면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다. 예산장터 버들국수집을 찾아가 장터국수 한 그릇 후루룩 먹고 돌아올까. 통영 바닷가 쪽 오래된 식당에서 도다리 쑥국을 먹고 박경리 선생 무덤이 있는 언덕바지에 올라 푸른 봄바다를 시리도록 바라보다 돌아올까. 섬진강변으로 매화꽃 구경을 한 뒤 벌교를 들러 삶은 참꼬막 푸짐하게 한 양푼 내놓는 밥집에서 한나절 그걸 까먹고 배불러 졸음 올 때 아무 데나 등 대고 낮잠을 한숨 자고 돌아올까.

‘봄’이라고 가만히 발음해 본다. 그러면 봄의 기운이 온몸에 젖어드는 기분이 든다. 봄은 무엇보다도 우리 몸과 마음에 찾아온다.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풀포기처럼 피어난다.//즐거운 종달새야/어느 이랑에서 즐거웁게 솟쳐라.//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윤동주, ‘봄’) 젊은 시인은 봄의 맥동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흐른다고 썼다. 또다시 새봄을 맞는다. 당신이 행복하건 불행하건 해마다 살아서 새봄을 맞는 것은 기적이다. 삶이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다. 우리가 웃기 때문에 그 웃음꽃에 행복이 내려앉는다. 왔던 것은 가고, 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한 번, 단 한 번 존재할 뿐이다. 해마다 오는 봄도 마찬가지다. 이 봄은 작년에 왔던 그 봄이 아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봄이다. 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봄이다. 저 남쪽 지방에서는 산수유와 매화 같은 봄꽃들이 피기 시작한다는 소식이 올라온다. 곧 시골 눈두렁길은 풀빛으로 파래지고, 뺨을 스치는 바람은 포근해질 테다. 파릇한 봄의 싹들과 빛나는 햇살 속에서 우리의 근심이나 우울 따위는 하찮은 것들이다. 자, 봄이 왔으니, 다시 힘차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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