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 함께하는 시간] 거절의 미덕을 알고 있는 식물

아침저녁으로는 아직도 두툼한 옷을 벗어두기 어려운 날씨지만 한낮에는 금세 마음이 바뀌어 걸친 옷들이 귀찮게 느껴지는 날들입니다. 이렇듯 계절은 아직 이른 봄이지만 한낮의 볕을 쬐며 식물원을 걷다 보면 식물들은 이미 겨울을 벗어버렸습니다. 매화가 피어 봄이 온 것을 알려주는 것 같지만, 사실 나뭇가지나 땅에도 이미 봄은 와 있습니다. 온통 회색과 갈색이던 나무들에서 연한 녹색의 기운이 느껴지고, 거무칙칙했던 땅도 알 듯 말 듯 무언가 생명의 빛이 감돕니다.

허리를 굽혀 생명의 빛을 쫓아가 봅니다. 정원 한가득 여러 식물들의 새싹이 흙을 헤치고 올라와 있습니다. 어두웠던 땅에 희미한 생명의 빛을 보여준 것은 바로 이 새싹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살금살금 또는 불쑥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솟아오른 새싹들을 보면 새싹이 꽃보다 더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갓 태어난 동물이나 어린아이가 그렇듯 모든 새 생명은 귀엽고 예쁩니다. 새싹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쁘고 귀여움에 그치지 않습니다. 굳이 지난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새 생명이 자라게 된 과정까지 생각하지 않더라고 소리 없이 거친 땅을 뚫고 나온 그 모습만으로도 의연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식물의 일생을 통해 볼 때 가장 연약한 모습일 것 같은 시기임에도 역설적으로 가장 의연함을 보여줍니다. 햇볕을 찾아 하늘을 향해 매일매일 꿋꿋하게 자라는 모습은 패기 넘치는 건장한 청년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여기저기 솟아오른 새싹들을 따라 발길을 옮겨 봅니다. 모양도 색도 다양한 새싹들이 사방에 가득합니다. 새싹은 모두 녹색을 띨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노란색, 붉은색 등등 다양한 색을 지녔습니다. 잠깐 멈춰 생각해 보면 이 점에 의문이 듭니다. 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 과정이 광합성인데, 광합성은 식물 세포에 있는 엽록체가 햇볕을 받아들여 화학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엽록소’라는 색소가 관여합니다. ‘엽록소’가 잎을 녹색으로 보이게 하는 물질이라는 뜻이고 보면 모든 식물은 녹색으로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식물의 새싹은 녹색 이외에 다양한 색을 나타낼까요. 광합성과 관련해 조금만 더 과학적으로 살펴보면, 빛의 성질과 광합성과의 관계에 비밀이 있습니다. 빛을 좀 더 분해하면 파장대별로 나뉘고 파장대별로 성격이 각각 다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누구나 한번쯤은 프리즘 실험을 해봤을 것입니다.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때 각각의 색이 빛의 서로 다른 파장대입니다. 빨강부터 보라까지인데 빨강 쪽이 파장이 긴 쪽이고, 보라 쪽이 파장이 짧습니다. 식물에 있는 엽록소가 빛에너지를 흡수할 때 이들 여러 파장대의 빛을 대부분 흡수해 에너지로 전환하지만, 녹색 파장대만은 흡수하지 않고 모두 반사시킵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 식물이 녹색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로 어떤 식물의 새싹이 붉은색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 파장대의 빛을 흡수하지 않고 반사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햇볕으로부터 오는 고마운 삶의 에너지를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린 새싹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햇빛의 파장대 중에서 붉은색 쪽이 광합성에 가장 효율적입니다. 그와 동시에 붉은색 쪽은 높은 열을 동반합니다. 어린 새싹이 광합성에 좋은 붉은색을 받아들이면 동반되는 열에 의해 과도하게 체온이 높아질 수 있고 이로 인해 아직 어린 새싹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 새싹은 이 점을 알고 고마운 빛이지만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새싹을 바라보며 저 자신을 생각해 봅니다. 일이든 음식이든 무엇이든 잘 거절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제안하는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거절하지 못하곤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거절하지 못해 분수에 넘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더 크게 미안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게 주어진 어떤 일이나 어떤 지위가 어린 새싹에 비추고 있는 붉은색 빛은 아닌지 말입니다.